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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Aug 06. 2020

김영삼 VS. 김대중

1992년 12월 18일 실시 _ 제14대 대통령 선거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 것은 그들을 관리하는 정부에게는 얼마나 행운인가."

- 아돌프 히틀러  




87년 체제 아래 두 번째 대선


92년 12월 18일 치러진 제14대 대통령 선거는 87년 민주화 항쟁으로 쟁취한 직선제 하에서의 두 번째 대통령 선거였습니다. 김대중과 함께 오랜동안 민주화 세력의 양대 거목이었던 김영삼이 90년 2월 3당 합당을 통해 유신 잔당인 김종필의 공화당과 신군부세력인 노태우의 민정당과 연합해 거대 정당 <자유민주당>을 만들어 여당으로 투항한 것은 민주화 세력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습니다. 3당 연합은 마땅한 권력 계승자가 없던 군부세력과 지역정당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고 있던 김종필이 내각제 개헌을 염두에 두고 출범시킨 인위적인 정치지형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어렵게 쟁취한 민주화의 성과물인 직선제 대통령제를 희생시킬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불안정한 권력분배였고 정통 민주화 세력에게는 그래서 김영삼이 민주화의 배신자로까지도 인식될 수 있었습니다.

민주화투쟁의 동지에서 숙명의 라이벌로




그러나 14대 대선이 다가오면서 김영삼이 택한 3당 합당은 어쩌면 '신의 한 수'였을 지도 모릅니다. 신군부 세력에게는 마땅한 정권의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서 민자당의 유력 계파 지도자인 김영삼의 부상을 견제하고 막을 세력은 없었던 것입니다. 김영삼은 이런 당내 역학관계를 절묘하게 이용하면서 '내각제 합의'를 철회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계속 시행할 것과 자신이 여당의 유일한 후보자임을 내세웁니다. 김영삼은 마치 '트로이의 목마'처럼 보수 거대 여당 민자당 속에서 민주화 세력을 대표하여 차기 대선의 유력 후보자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던 것입니다. 이는 3당 합당의 예기치 않았던 역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3딩 힙딩,  신의 한수 혹은 밀실 야합?


제14대 대선은 노태우의 5년 임기가 만료됨에 따라 1992년 12월 18일 실시되었습니다. 제14대 대통령 선거에는 이른바 3김 정치의 대표자 중 2명이 다시 권력의 핵심을 놓고 격돌했습니다. 이에 더해 14대 대선의 가장 큰 특색으로는 우리나라 재벌을 대표하는 현대그룹 총수 정주영이 출마했다는 점입니다.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 이외에도 여타 군소후보가 출마하여 총 8명의 후보자가 등록하였으나 선거전은 기본적으로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 제1야당인 민주당 김대중, 재벌을 대표하는 통일민주당의 정주영 후보 간 3자 대결구도를 보였습니다.


3자 대결 구도를 보인 14대 대선



라이벌이 된 민주화 투쟁의 동지


김영삼 후보의 선거구호는 ‘신한국 창조’였고, 김대중 후보는 ‘이번에는 바꿉시다’ 라며 정권교체의 기치를 내걸었고, 정주영 후보는 재벌 총수답게 경제운용 능력을 부각하며 ‘경제대통령론’을 폈습니다. 엄청난 대중을 선거에 동원했던 제13대 대통령 선거 때와 달리 이번 선거에서는 대중동원 연설회나 폭력사태는 없었으나 이번 선거도 여전히 엄청난 정치자금이 소모된 '금권선거'였고, 지역감정에 호소하는 지역주의의 병폐를 고스란히 들어낸 선거였습니다. 특히 인위적인 3당 합당의 영향으로 호남 대 비호남의 대결구도가 형성되었고, 선거 막판에 불거져 나온 이른바 '부산 초원복집 사건'은 이런 지역감정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이 부산 출신 김영삼의 당선을 위해 지역 기관장들을 모아놓고 선거기획 회의를 하면서 "우리가 남이가"를 외쳤던 일화는 오히려 지역감정을 자극하여 호남의 고립을 더욱 격화시켰습니다. 선거비용으로는 정확히 얼마나 사용되었는지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민자당은 5천억 원가량을 썼다는 비공식 통계가 돌기도 했습니다.  

김대중 후보 연설 장면

제14대 대통령 선거 결과 김영삼이 997만 표, 김대중 804만 표, 정주영 388만 표를 얻어 김영삼이 큰 격차로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선거에서 패배한 김대중 후보는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습니다. 선거제도적 측면에서는 제14대 대선에서 처음으로 부재자 투표소를 도입하여 그동안 부정투표의 온상으로 지목된 부재자 투표제도를 획기적으로 개선한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14대 대선 투표용지




김영삼 개혁의 칼을 뽑다


대선 승리 이후 김영삼 정부가 취임초부터 시작한 군부 내 사모임인 '하나회 숙청'에 국민들의 호응이 컸습니다. 김영삼은 신군부 내 실세들의 소모임인 '하나회'를 해체하고,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쿠데타의 주력 부대였던 보안사의 후신 기무사를 축소하고 국방부 고위 군 장성들의 비리를 감사하여 국방부를 민간인 통제하에 두었습니다.


금융거래의 투명화를 위해 긴급 경제재정 명령을 발동해 전격적으로 실시한 금융실명제도 우리 사회의 경제적 민주화, 투명성 강화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1993년 4월에는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노인을 북한으로 송환하여 남북관계의 개선을 위한 노력에 나서기도 했지만, 김영상 정부 내내 남북관계는 북한의 핵개발과 이에 대한 미국 정부의 강력 대응으로 정권 내내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1994년 7월 예정이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마저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불발되고 남한 내에서는 이른바 '조문파동'이 벌어지면서 남북관계는 더욱 경직되었습니다. 



전면적 지방선거 실시

94년 3월에 김영삼 정부는 전교조 교사 천여 명을 4년 만에 복직시켜 사회통합을 위한 조치를 시행했으며, 1995년 6월에는 광역단체장 선거를 포함한 지방선거를 전면적으로 실시하여 정치적 민주화와 지방자치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였습니다. 기초단체장부터 광역단체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국민들 손으로 선출하는 지방선거는 이로써 1960년 4.19 민주혁명 이후 처음 실시된 것입니다.




역사 바로 세우기

95년. 7월 검찰이 전두환 등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으로 고소 고발된 관련자 58명을 불기소 처분하자 이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높아지던 시점에 95년 10월  노태우의 비자금 계좌가 폭로되어 노태우와 전두환이 잇달아 구속되고 12월, 5.18 특별법, 공소시효 특례법 등이 국회를 통과하여 마침내 군사반란 및 내란죄, 집단 학살죄에 대한 공소시효 적용을 배제하는 법안이 마련되고 전두환과 노태우를 마침내 법정에 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성공한 쿠데타'에 대해서도 판결을 내릴 수 있게 된 대법원은 1997년 4월, 12.12. 군사 쿠데타 및 5.18 광주 민중학살에 대해 전두환은 무기징역에 추징금 2,205억 원, 노태우는 징역 17년에 추징금 2,268억 원을 선고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제15대 대선에서 김대중이 당선된 직후 모두 석방되고 말았습니다.

법정에 선 쿠테타 주역들




하나회 숙청, 금융실명제 도입, 역사 바로 세우기 등 경제 사회 민주화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낸 김영삼 정부는 집권 후기로 가면서 실정을 거듭합니다. 남북관계는 '조문파동'을 계기로 더욱 악화하고, 대통령의  차남인 김현철이 권력의 실세로서 온갖 비리에 개입함으로써 권력의 위신은 끝없이 추락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 몰락의 끝에는 97년 한보철강의 부도로 시작된 IMF 국가부도 사태가 있었습니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는 IMF 사태의 전조?




김영삼 시대를 생각하며 보면 좋은 영화,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79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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