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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서정 Sep 30. 2022

3. 빛에 쏠린 산책자

김연덕 시인으로부터 온 라이너 노트 

 슬픔 없이, 희미한 원망이나 미움 없이 지난 사랑의 주위를 거닐 수 있는 이가 몇이나 있을까. 그 걸음들을 ‘산책’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는 또 얼마나 있을까. 한밤의 환한 트랙처럼 아름답고 용감한 사랑은 그것을 넓게, 깊게, 자세히 감각하는 산책자들에 의해 발명되는 것. 조금씩 발견되는 것. 손서정에게 사랑의 과거, 현재, 미래를 나누는 것은 크게 의미 없어 보인다. 그는 현재의 사랑에서도 이 확실한 사랑의 빛이 여전히 남아 반짝일 미래를 보는 사람, 사랑과 사람과 빛이 성운처럼 흩어져 있는 머나먼 과거를 보는 사람이다. 지난 사랑은 때문에 그에게, 언제나 새롭게 구성되고 움직이는 현재이자 가벼운 미래가 된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많은 사랑들도 마찬가지다. 사랑에 주저함이 없고 사랑이 많은 손서정에게 사랑은 늘 차례로 달려올 준비가 된 것처럼 보이는데, 그에게는 아직 만져보지도 않은 사랑 역시 끝나지 않을 완전한 미래나 매끄러운 형태, 환상에 가깝다기보다 어쩔 수 없는 아름다운 어긋남을 가진 과거일 것이다. 사랑의 미래에서 과거를 볼 줄 아는 빛의 여유는 그만의 비밀이 된다. 


 손서정은 슬픔 없이 트랙을 돈다고 한다. 누구에게는 거추장스럽고 누구에게는 괴로움으로 가득할 남은 사랑의 거님을 산책이라고 확신한다. 동시에, 매일 새로운 빛을 받으며 새롭게 생동하는 사랑의 잔여물들을 성실히 탐구한다. 우주의 빛과 어지러운 사랑의 빛에 쏠린 산책자 손서정. 트랙 바깥에서 손을 흔들면 다시 제 손을 들어 잘 걷고 있다고, 걷기에 꽤 좋다고 웃어 보일 손서정. 그러나 그가 이렇게 의연한 산책자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감정의 두께를, 흩어진 우주 이야기들을 견뎌냈을지 짐작해본다. 폭발을 견딘 사람만이 가벼움을 안다. 슬픔을 견딘 사람만이 슬픔 위를 다른 이름으로 걷는다.


 그만의 이상하고 아름다운 산책법을 알려준 손서정에게 고맙다. 크고 작은 어긋남과 안녕들에게 그의 음악은 가장 따뜻한 웃음과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그의 음악이 내 안을 거닐고 밤새 산책하도록 내버려 둔다. 그럼 나는 내 앞에 닥친 사랑에 조금 더 용감해진다.


김연덕/시인


 연덕 언니에게 라이너 노트를 부탁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번 노래에선 가장 힘센 사랑의 순간을 말하고 싶었고, 언니는 내가 아는 사람 중 사랑에 가장 진심을 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연덕 언니의 첫 시집 <재와 사랑의 미래>를 읽고는 흰 빛 같은 사랑에 마음이 가득 차고, 빛의 열기에 마음이 아주 고요해진 적이 있었다. 긴 초 하나로도 마음을 남김없이 채울 수 있는 사람이기에, 불타고 남은 희뿌연 재에게마저 눈길을 주는 사람이기에, 라이너 노트를 꼭 받아보고 싶었다. 

 '갈피'는 우석 매니저님께 발매 자료를 넘기기 직전까지 제목이 확정되지 않았는데, 내가 이 노래를 생각할 때면 자꾸 어딘가를 유영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통 무언가에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목 말고도 그랬다. 음악을 만들 때에도, 앨범 커버를 찍을 때에도, 뮤비를 만들 때에도 나의 헤맴은 계속되었다. 연덕 언니에게 참고자료들을 보낼 때에도 그 기분은 계속되어서, 사실 되게 걱정했다. 이 규칙 없는 조각들로 내가 하고픈 이야기를 잘 전달할 수 있을까.  

  하지만 연덕 언니의 글을 받아보고서 내 마음은 아주 깨끗하고 건조해졌다. 유영하던 나의 마음이 언니의 글에 발맞춰 차분히 걷기 시작했다. 더 하릴없이 산책할 용기가 생겼다. 참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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