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 타오르는 열정 보다 오래가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
사원 대리 때까지만 해도 열정적으로 일한다는 그 기세를 참 좋아했다. 새로운 프로젝트가 주어지면 늦게까지 야근을 해가면서 기획서를 만들었고, 성과가 나면 그 자체로 살아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커리어가 10년을 넘어가면서 깨달았다. 열정은 오래가지 않는다. 슬프지만 일단 체력이 안되고, 주어지는 업무의 범위도 넓어져서 하나에 강하게 몰입할 수 있는 환경 자체가 성립 불가능. 그리고 깨달았다. 지속 가능한 커리어에는 ‘불꽃’이 아니라 ‘불씨’를 관리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이제는 어떻게 오래 일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여전히 일하고 싶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1. 근속연수 평균 24년인 회사의 비밀
우리 회사는 평균 근속 연수가 긴 것으로 유명하다. 제조업 중에서도 정말로 손꼽히게 근속연수가 긴 것 같다. 20년, 25년 일하신 분들이 수두룩하고 정년을 채워 퇴직하는 선배들의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특히 업무 관계로 공장으로 출장을 가면 거기서 일하시는 선배들은 본사보다 더 오래 근속하신 분들이 많다. 나는 지금 4번째 회사에서 총 14년 차를 맞이하고 있는데. 한 회사를 30년 가까이 다니는 사람은 얼마나 대단한 것일까. 일종의 경외감마저 느끼며 선배들에게 비결을 물어보면 특별한 것 없단다. "그냥 힘들면 쉬고, 휴가 내 어디 여행 다녀오고. 괜찮아지면 다시 하는 거지 뭐."
처음엔 그 말이 너무 단순하게 들렸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그 단순함이 깊은 철학으로 느껴졌다. 옆에서 가만히 보면 그들은 일을 생활의 일부로 두되 '자신의 일부'로 대하지 않고 거리를 둔다. 좋을 때도, 힘들 때도 감정의 진폭을 크게 만들지 않는다. 잘될 때 쉽사리 들뜨지 않고, 안될 때는 침착하게 물러서며 일상 속에서도 일정한 리듬을 지킨다. 출근과 퇴근 시간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일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자신만의 루틴을 고집하며, 그렇게 나오는 리듬이 지속성의 비결인 듯했다. 연륜이 쌓이니 그 리듬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업무가 착착 진행된다. 괜히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라는 소리가 있는 게 아니다. 대신 그 경지까지 가기 위해 선배들도 고군분투했겠지 싶었다.
나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오래 일한다’는 건 끈기로 버티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고갈시키지 않는 법을 아는 것이다. 일이 잘될 때는 욕심이 생기고, 안될 때는 자존심이 흔들린다. 그럴 때마다 마음의 속도를 늦추고 스스로를 점검해야 한다. 그 균형을 유지해야만 회사 밖의 나와 개인생활을 제대로 즐길 수 있고, 회사 이후의 내 삶을 준비할 수 있을 테니까.
2.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하는가?
회사 생활을 하며 10년 정도가 넘어갔을 때 생기는 가장 큰 적은 '싫증'인 것 같다. 일이 어렵다고 느끼는 것보다 무서운 건 마음이 식는 것이다. 처음엔 재밌고 설레던 일이 어느 순간 의무가 되고, 부담이 된다. 그때부터 일은 말 그래도 재미없는 ‘노동’으로 변한다. 나 역시 그런 시기가 있어 성과가 나도 예전처럼 기쁘지 않았고, 회의 자리에서 말하는 나 자신이 어딘가 형식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이 일을 계속하고 싶은 걸까?” 그 질문이 머릿속에 떠돌았다. 그래서 나는 다른 일, 다른 환경, 새로운 경험을 찾아 공부와 이직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언제까지 그런 패턴을 유지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지겨울 때마다 새 일 찾아 퇴사하는 걸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연차가 올라갈수록 이직 자리도 사원 대리급처럼 자주 나오지 않고, 열리는 포지션이 단순히 '도전'으로 여기기엔 너무도 무거워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더욱 어려워진다.
그래서 요즘은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좋아한다는 건 감정이 아니라 의지라는 것. 직장인으로 살기로 커리어 방향을 정했다면 필요한 일종의 자기 암시다. 좋아하는 일이라고 해서 항상 즐겁고 설레는 건 아니다. 때로는 지루하고, 억울하고, 화가 난다. 하지만 ‘이 일을 계속 좋아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으면 그 감정들을 견딜 수 있다. 좋아하는 마음을 유지하기 위한 연습이 필요한데 예를 들어 보고서를 쓸 문장을 좀 더 설득력 있게 표현의 완성도를 높여본다든지. 의외로 늘 하던 일을 살짝만 바꿔서 해도 작은 자기만족이 느껴진다. 후배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가 한 일들이 조금씩이나마 변화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해 보는 거다. 매너리즘이 온다면 내가 하는 일이 결국 어떤 긍정적인 변화를 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생각보다 많은 부분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들이 지속될 수 있다면 나는 그래도 일을 여러 관점에서 좋아하며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3.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하려면, 나 자신을 아껴야 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지칠 수 있다. 그건 열정이 식어서가 아니라, 자기 돌봄이 부족해서다. 우리는 종종 ‘좋아하는 일’이라는 말에 속는다. 좋아하니까 더 해야 하고, 더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하기 위해선 ‘덜’ 해야 할 때가 있다. 회사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는 종종 자신을 도구처럼 다룬다. 성과를 내기 위해 잠을 줄이고, 감정을 억누르고, 몸이 신호를 보내도 ‘조금만 더’를 외친다. 마치 이걸 달성하면 대단한 보상이 올 것 같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잊지 말자, 나는 노동과 금전적 보상을 맞바꾸는 것으로 회사와 계약을 했을 뿐이라는 것을. 물론 책임감과 주인의식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나 자산보다 소중한 게 아니라는 거다.
맹렬하게 일만 하던 선배, 후배를 보면 건강을 해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위염, 식도염 같은 건 흔하고, 오래 책상에 앉아서 모니터만 보고 있다 보니 목 디스크, 허리디스크, 계속 노트북이나 태블릿으로 작업을 하니 손목이 안 좋은 사람들도 많다. 야근으로 개인생활시간이 없어 운동도 안 하고 늘 외식을 하니까 대사증후군이나 당뇨병 같은 질환도 흔하다.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궁지에 몰리거나 과도한 압박감을 느껴서 공황장애가 생긴 사람들도 있고. 회사에서 일을 하는 것은 결국 달성감이나 금전적 보상 등을 통해 나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것일 텐데 스스로의 건강을 해쳐서야, 주객전도라고 할 수 있겠다. 회사일로 인해 건강이 안 좋아졌다면 과감하게 휴직이나 퇴사를 하고 제대로 쉬어주어야 한다. 망친 건강을 회복하는 것보다 새 일을 찾는 게 더 쉽다.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일하는 자기 자신을 동료로 대한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혹사시키지 않고, 칭찬할 줄 알고, 때로는 ‘괜찮아, 오늘은 이 정도면 됐어’라고 말할 줄 안다. 일종의 자기 친절, 자기 긍정이다. 자기 친절은 게으름이 아니라 계속 일하고 싶은 마음을 지키기 위한 전략이다. 몸이 지치면 휴식을 취하고, 마음이 흐려지면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머리가 복잡하면 글을 쓰거나 산책을 한다. 결국 지속 가능한 커리어의 핵심은 나를 잘 경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미워하지 않고, 다그치지 않고, 돌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일도 오래간다. 결국 자신을 잘 아끼는 사람이 살아남는 법이다. 안 그래도 이 험한 세상, 내가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면서 항해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