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계속 배우는 중
직장 생활이 10년이 넘어가면 ‘이제는 일을 좀 안다’, ‘내 커리어의 방향이 보인다’, ‘이제 안정됐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시장 상황은 계속 바뀌고 회사의 목표도 시장에 맞게 움직인다. AI가 대중화되고, 새로운 기술이 업무의 방식을 바꾸며, 어제까지 익숙했던 일의 흐름이 오늘은 낡은 것으로 취급된다. 회사라는 울타리 안에서도 그 변화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고, 그 변화는 계속되며, 평범한 직장인으로서 완성된 커리어란 결국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이제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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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커리어는 완성이 아니라 갱신해 나가는 것
회사 생활에 익숙해지면 루틴이 만들어지고 일에 대한 감도 생긴다. 성과를 내는 법도, 동료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요령도 어느 정도 익힌다. 그런데 바로 그 익숙함이 성장의 가장 큰 적이 된다. 몸에 익은 익숙함을 포기하기 싫어서 요령을 피우다 보면 결국 소극적이 되기 때문에, 주변은 모두 성장하는데 나만 제자리걸음일 수 있다.
내가 은퇴를 곧 앞둔 시니어라면 모를까 앞으로 직장 생활을 십몇 년은 더 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더더욱, 회사 안에서의 내가 마지못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성과를 내는 즐거움을 맛보면서 조금씩 성장해 나가는 그림이 바람직하겠다. 냉정히 생각해 보면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경제적 독립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풀타임 잡을 가지게 되는데 물려받을 자산이 많다든지 파이어족이라든지 하는 특별한 예외적인 사항이 있지 않은 이상, 은퇴하기 전까지는 회사생활을 하게 된다. 그 기나긴 시간 동안 대단한 목표를 두고 그걸 완성하기 위해 달리기보다는, 연차에 따른 작은 목표들을 여러 개 만들어 두고 그걸 순차적으로 달성하며 나 자신의 역량을 갱신해 간다고 생각하는 것이 조금 더 현실적인 듯싶다.
나는 몇 번의 이직을 거치며 이 사실을 체감했다. 새로운 환경에서는 자신감보다 두려움이 앞섰고, 익숙했던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순간마다 일하는 방식의 갱신이 필요했다. 그건 단순히 회사를 옮기는 일이 아니라, 내가 가진 업무 시스템을 새로 세팅하는 일이었다. 직무가 요구하는 역할도 계속 진화하는데, 기획자는 데이터의 언어를 이해해야 하고, 마케터는 기술과 플랫폼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직무의 경계가 허물어진 시대에, 나 또한 고정된 정체성에 머물 수 없다. 커리어의 지속 가능성은 이처럼 시류에 맞게 변화하며 갱신해 나가는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낡았던 과거의 나 자신의 모습도 업데이트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다.
2. 시대가 변하면 역할도 변한다
예전에는 ‘관리자’가 되는 것이 커리어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지금 관리자는 마냥 사람들을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조율자, 문제 해결자, 협업 촉진자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조직에 더 밀착해 일하고 사람들 간의 협업이 원만하게 일어날 수 있도록 서포트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큰 것 같다. 조직은 과거보다 더 수평적으로 변했고, 리더는 지시하는 존재가 아니라 연결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제는 직무 전문성만으로는 부족하고 여러 언어를 이해하고 서로 다른 세대와 협업하며, 가끔은 내 생각을 유연하게 꺾을 줄 아는 감각이 필요하다.
지금의 내 역할은 여전히 유효한가? 나는 지금 시대 지금 상황에 맞는 언어로 일하고 있는가? 자문해 보는 것도 필요하겠다. 계속 조금씩 변화해 나가야 하는 것은 귀찮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하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 거기에 따라가야 하기에 불안할 수도 있지만 그건 내가 다시 배울 수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AI의 등장이 그렇다. 처음에는 멀리 있는 기술처럼 느껴졌지만 업무에 활용할 수 있는 툴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지금은 챗지피티 같은 툴을 업무에 활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나도 우리 회사가 승인해 준 마이크로소프트의 코파일럿을 쓰고 있는데, 수집한 데이터를 요약하거나 디자인 목업을 만들거나 시장 조사를 하는데 아주 유용하게 쓰고 있다. 기존에는 고객들 댓글을 취합 정리할 때 액셀로 함수를 걸어가며 이리저리 다듬었는데, 코파일럿을 쓰면 요약은 물론이고 자주 언급된 단어들과 그 연관단어들까지 워드클라우드 형태로 빠르게 정리를 해주니 정말 편리해졌구나 하고 체감했다. 수작업으로 했다면 시간이 꽤나 많이 소요되었을 텐데,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큰 장점이다. 영상 작업물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비싼 돈을 들여 스튜디오에 맡겼는데, 이제 간단한 영상은 AI 툴을 통해 비전문가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돈과 시간의 획기적인 절감이다. 물론 AI 툴들도 그냥 쓰면 그저 그런 결과물이 나오고, 요구사항을 명확하게 기입하고 배경 설명도 충분히 해야만 좋은 결과물이 나오기 때문에, 요즘에는 챗봇 같은 서비스를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명령'을 잘 내리는 법을 고민해야 한다.
에필로그
14년 동안 네 개의 회사를 거치며 나도 굉장히 다양한 일을 해왔다. 성공과 실패, 기대와 실망을 번갈아가며 겪고 그 과정에서 배운 건 화려한 성과에 연연하기보다 ‘일과 나 사이의 거리’를 조절하는 법이었다. 일을 너무 가까이 두면 내가 녹아버리고, 너무 멀리 두면 애정이 식어버린다. 적당한 거리에서 일과 나를 함께 성장시켜 가는 것이, 이제는 커리어의 기술이자 마음의 기술이 되었다.
성과보다 태도가 오래 남고,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며, 열정보다 지속성이 힘이 된다. 이건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야 알게 된 진실이다. 돌이켜보면, 회사라는 세계는 늘 예측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내가 스스로 계속 조금씩 변화시켜 가는 한, 이 여정은 결코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는 것. 나는 여전히 선배로부터, 동료로부터. 후배로부터, 일로부터 배우는 중이고 앞으로도 열심히 일하고 좋아하는 일들을 하며 행복하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