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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키뉴 Jul 23. 2022

'매우 그러한 편이다'에 동의한다, 어느 정도는

'너는 MBTI 뭐야?' '나는 '엔프피(ENFP)'야.'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그리 낯설지 않은 말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MBTI 검사가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데 도움이 되어 좋다고 한다. 그런 사람 입에서 마저, '하여간 'T'랑은 대화가 안 돼' 따위의 드립이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오는 걸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온다. 하긴, 내가 이해하는 이해가 다른 사람이 이해하는 이해와 항상 같지는 않으니까.


"OO씨는 뭐예요?" 재작년, 회사 사람들이 내게 물었다. 그때 처음으로 MBTI라는 걸 알게 되었다. "OO씨도 얼른 해 보세요." 귀찮아 하는 기색을 숨기며 핸드폰을 꺼냈다. 결과는 'INFP'로 나왔다. 그들은 그게 어떤 뜻인지 하는 설명을 막힘없이 외워 나갔다.


그 후 1년. 무성의하게 일하는 사람을 그동안 너무 많이 봐 와서인지, 아니면 그게 무성의하다고 보는 내 편견이 너무나도 커져버려서인지⋯. 아무튼 지난 1년이란 세월은 나를 바꾸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검사를 다시 했다. 이번엔 'INTP'라 하였다.


'N'은 직관이나 영감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사람을 뜻한다고 하였다. 설명에선 이 세상에 INFP에 속하는 사람이 아주 드물다 하였다. INTP에는 아인슈타인이니 빌게이츠니 하는 대단한 사람들도 있다고 하였다. 마치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도 된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어쩜 이렇게 나를 잘 표현할까 싶었다. 


그리고 다시 1년. 최근에 MBTI 문항이 바뀌었다고 하였다. 새로운 문항으로도, INFP라는, 아니면 INTP라는 그 멋있는 결과를 다시 만났으면 했다. 나란 놈은 어제도 오늘도 한결같이 그런 놈이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나 보다. 또 검사를 해 보았다.


출처 : 16personalities.com (접속일 : 2022. 7. 23.)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알 듯, 각 문항에는 일곱 개의 동그라미가 있다. 피검사자는 그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가운데에는 하얀 동그라미가 있다. 가장 작다. 그 왼편엔 세 개의 동그라미가 자리한다. 해당 문항에 동의한다는 뜻이겠다. 오른편에도 세 개가 자리한다. '비동의', 그러니까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이겠다.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그 극단에 있는 동그라미가 가장 크고, 그로부터 멀어질수록 동그라미는 작아진다. '가능하면 답변 시 '중립'을 선택하지 마십시오.' 그제서야 가운데 가장 작은 동그라미가 '중립'을 뜻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출처 : 16personalities.com (접속일 : 2022. 7. 23.)


첫 문항이다. 친구를 만드는 데 이렇다 할 주기를 두어 왔던 건 아니니까, 오른편 동그라미를 선택해야겠다. 한편, 학교에 갈 때도, 회사에 갈 때도 나는 줄곧 친구를 만들어 왔으니까, 왼쪽 동그라미를 선택해야 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이처럼 그 기간이 일정한 건 아니었다. 나는 바보가 아닐까 싶다. 


어떡할지 몰라 '중립'을 택할까 한다. 근데 그건 '비동의'랑 다르지 않아 보인다. 시간 여러 개, 즉 친구를 만들고 그 다음 친구를 만들 때까지 걸린 시간 여러 개가 모두 같은 듯하면서도, 모두가 같다고 하기 어려운 건, 결국 모두가 같은 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언제부터 남의 말을 잘 들었다고, 가급적 중립은 택하지 말라는 주의 사항이 마음에 걸리기도 한다. 


아무래도 '비동의'가 좋겠다. 그래도 의문은 가시지 않는다. 주기적이지 아니함이 그렇게도 아니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함이 그렇게도 아니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 오른편에 있는, 하지만 가장 크지는 않은 그런 동그라미를 택해야 하지 않을까? '이젠 이런 고민 하지 말아야지' 하며 어지러운 마음을 다잡고 다음 문항으로 넘어갔다.


출처 : 16personalities.com (접속일 : 2022. 7. 23.)


잘 나가다가 또 하나가 걸렸다. '매우 감상적인 편이다'라는 문장은, 매우 감상적인 기분으로 일을 처리하는 부류, 혹은 그런 기분에 쉽게 사로잡히는 부류가 있는데, 그러한 부류에 대체로 속한다는 뜻이겠다. 대체로 그러하다 했으니 꼭 그러하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나는 감상적일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감상적이라 하더라도 그저 그렇게 그럴 때가 있는가 하면, 매우 그러할 때도 있다. 그래도 매우 그러할 때가 아주 적다고 보긴 어려우니, 나는 매우 감상적인 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왼편 동그라미를 택하겠다 마음을 먹는다. 


난감한 일이다. '매우 감상적인 편이다'라는 주장에 강력하게, 그러니까 매우 동의해야 할까? 아니면, 살짝, 어느 정도만 동의해야 할까? 살짝만 동의한다면, '매우 감상적인 편인 편이다' 정도로 이해될 텐데. '매우 감상적인 편이긴 한데 어느 정도만 그러하다'로도 이해될 수도 있겠다. 아무래도 확실히 답하는 게 좋겠다 싶어, 왼편 가장 큰 동그라미를 누른다. '매우 매우 감상적인 편이다', 아니면 '매우 감상적인 편에 확실히 속한다' 같은 아리송한 말이 되겠지만 말이다.


'자유 시간 중 상당 부분을 다양한 관심사를 탐구하는 데 할애한다', '자신보다는 남의 성공을 돕는 일에서 더 큰 만족감을 느낀다', '감정이 매우 빠르게 변하곤 한다', '다른 사람의 주의를 끌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다.' 뭐 이런 식으로 된 문항이 열 개는 넘었던 것 같다. 


문항을 하나씩 넘어갈 때마다 개운치 않은 기분은 점점 커져 갔다. 총 검사 시간이 12분 내외라고는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지나서야 검사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지난 두 번의 검사에서도 나는 이 모양으로 골치 아파하고 있었다. 


이번엔 'ISTP'라 했다. 아쉬웠다. INFP처럼 아니면 INTP처럼, 직관 혹은 영감에 의존한다는 나의 그런 모습이 좋았는데. 잠깐 머물다 떠나버린 걸까? '너도 나이들면 그렇게 될 거야' 하는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인정하고 싶지 않다. 어쩌면 그런 모습은 내 곁에 머문 적 없을지도 모르겠다.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하니 부끄러웠다. 보이고 싶은 대로 답했으면서, 마치 지금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마냥 답했다는 뜻이 될 테니 말이다. 허영이 들통난 기분이다. 그러다가도, 제임스 본드와 마이클 조던이 ISTP에 해당한다는 설명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사실은 그들이 누군지도 모른다.


골치를 썩인 문항이 몇 개나 있었는지 알고 싶어져, 검사 페이지로 돌아갔다. 모든 문항에서 가장 작은 동그라미를 찍고 넘어갔다. 문항은 읽지도 않고 그렇게 했다. 어느새 '검사 결과' 버튼이 나왔다. 눌렀다. 또 ISTP가 나온다. 나무위키에서 ISTP에 대한 설명을 찾아 보았다. '논리적인 실용주의자'라느니, '조용히 자기 일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느니 하는 설명 중에, 문장 하나가 눈에 띄었다. 


사회성이 부족한 편이다.


⋯. 그러한 편이 확실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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