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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키뉴 Dec 15. 2022

동성애자세요?

이성애의 이유

반 년 쯤 지났을까? 우리가 함께 식사를 하던 어느 날이다. 처음 와 본 모임이라 그런지, 원색적인 이야기가 오가는 그 자리가 내겐 적잖이 낯설게 느껴졌다. 텐션을 따라갈 엄두도 나지 않고 해서 잠자코 있자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고 다시 이야기를 낳아 주제는 게이라는 데까지 오게 되었다. “깔깔깔.” 모두가 이야기에 몰두하는 동안 나는 비싼 안주만 골라 부지런히 축내고 있었다.


“진영이 앞에선 말 조심해야 해. 진보적인 친구야.”


나를 가리키며 한 친구가 말했다. 나를 조금은 안다 하는 녀석이다. 진보적이라 했는지 개방적이라 했는지. 누군가의 입에서 게이 비하 발언 같은 게 나온 거 같진 않은데, 그는 내 앞에서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듣고 있지 않았으니 그것이 위험한 건지 안전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비싼 음식을 축내다 들킨 기분이랄까.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지금 내가 말을 해도 되나 싶어 눈치를 살피고 있을 때, 그날 나를 처음 알게 된 녀석이 내게 물었다.


“혹시 남자가 예뻐 보이고 그러세요?”


나는 남자 사람이다. 데이트, 섹스 등등 연애라 할 만한 건 이제껏 모두 여자 사람과 했다. 예뻐 보이는 사람은 대부분 여자이기도 했고. 그렇지만 그중에 남자가 하나도 없었던 건 아니다. 진보 여부 혹은 개방 여부의 척도가 어째서 동성에 대한 미추 판단이 되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그는 내게 그렇게 물었다. 예쁜 남자는 예쁘겠지. 예쁜 여자가 예쁜 것처럼. 이런 건 ‘키 큰 장신’이나 ‘새로운 혁신’ 같은 동어반복으로 보이지만, 누군가에겐 오히려 ‘키 작은 장신’이나 ‘낡은 혁신’ 같은 형용모순쯤으로 보이는 듯하다. 걔도 그래서 그렇게 물었지 않았나 싶다. 그렇다면 나는 동성애자일까? 


내 마음을 훔쳐간 여자는 봤어도 그렇게 한 남자는 못 봤다. 살면서 그랬다. 그러니 나는 이성애자라 할 수 있겠다. 근데 좀 이상하다. 그런 여자가 아직 없던 시절, 나한테도 분명 그런 시절이 있잖아. 한 20년은 그렇게 산 거 같은데. 그 20년 세월은 당시 내가 이성애자가 아니었다는 증거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내가 동성애자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언젠가는 내 짝을, 그러니까 여자를 만날 거라 기대했을 뿐이다. 남자의 경우라도 그때처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언젠가 그런 남자가 오겠지 하고 말이다. 나의 정신이 나가버리게 할 정도의 남자가 아직 없었다는 사실이 곧 내가 이성애자임을 증명하진 못하는 듯하다.


‘예쁜 남자’는 정말 형용모순에 지나지 않는 걸까? 남자에게 마음 뺏길 일 절대 없지. 그러니까 나는 이성애자인 거야. 역시나 개운하지 않다. 이성애가 주류인 세상에서 수십 년을 살아 왔고 그런 세상에서만 살아 봤으니 말이다. 그런 게 납득이 될 리 없잖아.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살던 사람에겐 직업을 선택할 수 없는 현실이 고통이겠지만, 공산주의 사회에서만 살던 사람에겐 직업을 선택해야 하는 현실이 고통일 것이다. 내 성적 지향을 스스로 따져 묻는 이 모습 누구에게 들킬까 두려울 정도니, 나는 남자에게 절대 마음 뺏기지 않는 사람이라 하는 그런 이유 역시 이유답지 않아 보인다.


이성‘애’는 이성 간 ‘애’, 그러니까 사랑을 뜻하겠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무얼 뜻할까?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언젠가 영화에서 들은 말이다. 그 영화를 본 이후로 사랑이란 그런 거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정의하는 걸 보니 당신은 남의 시선을 과하게 의식하시는군요. 자존감이 낮다는 뜻이죠.” 누가 그렇게 말했다. 자존감을 높이려고 다른 정의 어디 없을까 생각도 해 봤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그게 제일이라는 결론을 내려버린 것 같다. 남친룩, 여친룩처럼 자기의 패션에 악세사리가 되어줄 이성과, 아니면 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한 근사한 반지를 선물하는 이성과 시간을 보내는 걸 두고 사랑이라 하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이러한 사랑에는 성별이 조건으로 자리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남자든 여자든 사랑할 수 있다고 하는 게 일관적이지 않을까? 나란 녀석은 근데 왜 일관성을 이렇게 좇는지 모르겠다만. 이렇게 보니 내가 예수 흉내를 내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뭐 다 사랑한대. 


“그런 건 사랑이 아니야.” 이성애, 즉 ‘헤테로섹슈얼'이라는 영단어를 보고 이성 간 삽입, 뭐 이런 걸로도 정의할 수 있겠다. 정말로 사람들이 말하는 걸 들어 보면, 누군가는 임신 가능성을 사랑의 조건으로 보는 듯하니까. 그런데 삽입을 그 기준으로 둔다 해도 시원치 않은 건 매한가지이다. 이제껏 이성과만 성관계를 했다가, 아 이제야 나를 알게 되었지 하며 커밍아웃을 하는 사람도 있지 않겠는가. 커밍아웃 후에 다시 커밍아웃을 할 수도 있고 말이다. 내가 그런 사람 중 하나가 되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 여자랑 삽입 행위를 어제 했는지나 내일 할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중요한 건 바로 지금 너가 누구랑 하고 있는지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나는 지금 누구랑 하고 있는가? 당신은 안다. 지금 나는 글을 입력(input)하고 있고, 가끔씩은 문장 전체 아니면 단락 전체를 곳곳에 삽입(insert)하고 있다는 것을.


삽입 여부를 성적 지향의 요인으로 보는 게 우습단 생각도 든다. 삽입 없는 섹스만을, 섹스 없는 관계만을 추구하는 이성애자도 있고, 그런 동성애자도 있다는 걸 최근에야 깨달았으니 말이다. ‘굵기냐 길이냐’ 같은 멍청한 논쟁에서 어그로나 끌려가지고, 정작 세상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는 몰라 본 거지. 문득 이런 농담도 생각나는군. “가족이랑은 하는 거 아니야.” 여자랑 삽입하는 게 좋다며 여자를 사랑하는 게 좋다며 여자와 결혼한 남자의 농담. 어쩌면 그 사람도 지금쯤 자신의 성적 지향을 따져 묻고 있을 수 있겠다.


나는 답했다. 


“네.”


그곳은 이 말이 저 말을 끊고 그 말이 다시 이말을 끊는 그런 자리였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어떤지 들어 볼 수 있다는 기대에서였을까? 나는 그렇게 짧게만 답하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오~~ 이쯤에서 한 잔 하시죠!”


‘짠~’ 하는 소리와 함께 저마다 잔을 들어 식탁 한 가운데로 모은다. 여기선 생각을 하고 말하면 안 되는 것 같다. 이번에도 당했군. 모두 어그로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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