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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키뉴 Oct 17. 2022

어려서 그래

응, 니 얘기~

방 문을 연다. 교수 A와 친구들이 함께하는 식사 자리다. 다들 늦는다고 했지만, 그래서 내가 제일 일찍 온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이미 방에는 왁자지껄한 웃음이 가득했다. 학생과 저렇게 떠드는 교수가 있다니. 내가 운이 나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러운 기분이 오랜만이라 그런지, 어색하게 그리고 불편하게 이쪽저쪽 고개를 조아리고는 내 자리라 하는 곳에 바삐 엉덩이를 붙였다. 


"인사 똑바로 안 하냐?" A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조크다. 조심히 일어나 다시 인사를, 그것도 배꼽 인사로 올린다. 나는 A를 모른다. 이름만 들어 보았을 뿐 학생 적에 그의 수업을 들어 보진 않았다. 그도 나를 모른다. 다른 친구들은 이미 그와 친하다. 한 친구가 나를 문학상 받은 녀석이라 소개한다.


"문학? 뭐? 소설?"

"아니요. 수필…."

"뭐, 수필? 어린 놈이 무슨 수필. 수필은 나이들어 느지막할 때나 쓰는 거지. 너 때는 소설 쓰는 거야, 소설. 어허허허."


그가 먼저 웃음을 터뜨린다. 역시나 조크다. 그 자리는 드립에 드립을 더하는 자리였으니까. 주변 친구들은 조용한 웃음을 보인다. 눈을 지그시 감고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친구도 있다. 삼가고 엄숙하기까지 하다. '그래 그게 진정 수필이지. 암, 그렇고 말고.' 이런 느낌으로다가 그러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어려서 그래


누구나 들어 보았을 말이다. 누구나 써 보기도 했을 말이다. '어려서 그래'란 보통, 나이 어린 누군가의 언행 혹은 생각이 무모하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현상을 두루 헤아리지 못하였다고, 아니면 깊이 생각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말인 것이다. 그가 과연 두루 헤아리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깊게 생각하지 않은 것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을 테지만.


우리는 언제나 무모할 수 있다. 나이가 많든 적든, 멍청한 짓은 누구나 저지를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원인을 나이라 생각하려는 것 같다. 무리수를 두게 하는 무한 가지의 이유 중에서, 하필이면 나이를, 그러니까 그 사람이 살아 온 시간이라 할 수 있는 나이를 그 이유로 드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어려서 그래'라는 말에는 무르익지 않았다거나, 설익었다거나, 숙고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식으로 시간과 친한 말이 뒤따라 오는 일이 드물지 않다. 때론 치기(稚氣), 즉 어린 기분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대놓고 말하기도 한다.


'어려서 그래'가 꼭 나쁜 뜻으로만 쓰이는 것인지 반문해 본다. 누군가의 활기찬 모습을 두고, 해맑은 미소를 두고, 아니면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는 그 패기를 두고, 어려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쉽게도, '어려서 그래'는 그럴 때 쓰는 말이 아닌 것 같다. 그리 오랜 세월을 살아 오진 않았지만, 내 기억 속에서는 적어도 그러하다. 어린 누군가의 언행을 긍정하고 싶을 땐 보통, '청춘이네 청춘이야', '젊음이 좋아',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뭐 이런 식으로 말할 뿐이다. 편견일까? 편견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편에 서 있으니까.


다른 편에 선다는 것은 다른 세상에 산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세상에서 살아간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버즈라이트이어>에서, 주인공 버즈의 광속 비행 4분은 정착촌 대원들의 4년과 같다. 시간 지연 현상이 일어나는 특수 케이스라서 그렇다 여길 수 있겠지만, 우리의 일상도 이와 그리 다르지 않다. 버즈는 불시착한 행성을 타지로 여겨 도전을 멈추지 않지만, 다른 대원들은 이제 그곳을 본국으로 여겨 지구로 돌아가기를 포기하는 것과 비슷하다. 성균관 의례정립위원회의 기자회견문을 보고도, 어떤 남자는 '그래, 유교엔 성차별적 요소가 있지'라 하지만, 어떤 여자는 '말세다 말세야. 별 걸 다 차별이라 하네'라 한다.


나이란 그렇게 저마다 다르게 들어가는 것 아닐까? '애늙은이'나 '어른아이' 같은 형용모순은 이를 방증하는 단어라 할 수 있다. 군대에 가면 어른이 된다지만, 군대에 백 번을 더 가더라도 어른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있지 않겠는가. 무얼 제대로 먹으려면 입을 사용해야 할진대 네놈이 나이를 제대로 먹었는지 모르겠다 하여, '나이를 똥구멍으로 처먹었냐?' 같은 시적 표현이 나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려서 그래'라 하는 일종의 원인 규명이 타당하다고 하기엔 아직 뭔가가 부족해 보인다. 그런 세상을 상상해 본다. 어떤 공인된 기관이 심사하여 사람에게 나이 값을 부여하는 세상. 어제까지는 동갑내기였던 이가 오늘은 큰 언니가 될 수도 있다. 아빠의 나이가 나보다 적게 되는 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기관의 심사가 아니라도, 성인식 같은 것을 소생케 하면 역시나 그런 세상을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 절차라 할 만한 게 어디 없나 생각해 보지만, 한국에서는 고작해야 떡국 한 그릇 호로록 잡수는 게 전부라 할 수 있다. 아! '난 이제 더 이상 소녀가 아니예요. 그대 더 이상 망설이지 말아요' 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도 절차라면 절차라 할 수도 있겠다.


알다시피 심사나 성인식 같은 것은 없다. 해가 지날 때마다 우리는 똑같은 방식으로 나이 값을 부여받는다. 한 해를 더 살면 한 살이 더 매겨지고, 두 해를 더 살면 두 살이 더 매겨진다. 생각이 깊어졌든 얕아졌든 말이다. 나이라는 녀석은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죽지 않고 오랫동안 살아있는 것이 아닐까?


한편, 의심도 든다.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할까? 나이라는 놈은 과연 사람마다 다르게 들어가는 것일까? 우리가 저마다 다른 편에 서 있다고는 하지만, 그 편이 늘 새롭지만은 않다. 때가 되면 '20대'라는 편에, 때가 되면 '40대'라는 편에 편입되기도 하는 게 우리의 삶이지 않은가. '결혼'이라는 세상에도 편입되고, '부모'라는 세상에도 편입되고 말이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어린 사람의 언행을 두고, 마치 설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그 원인을 나이로 지목하곤 한다. 범인은 바로 너! 아홉 살인 너가 지금 보고 듣는 것은, 내가 아홉 살 때 보고 들은 것과 같다. 같은 것을 보고 들었으니 배우는 것도 같다. 너의 언행은 어릴적 나의 언행과 같을 수밖에 없다. 지금은 비록 무모한 짓을 저질렀다 해도, 내 나이가 되면 그러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지금 그러지 않는 것처럼. 왜냐? 나는 어리지 않으니까. 어른이니까. 이런 느낌으로 말이다. '날 때려줬던 그 선생이 그땐 정말 미웠는데, 나중엔 이해가 되더라. 너도 좀 더 크면 알게 될 거야.'


우리가 정말 비슷한 삶을 살고,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다른 삶을 사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비슷한 삶을 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어려서 그래'라는 말은 누군가의 과거를 추측하기에 요긴한 단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어린 친구의 무모함을 나이 탓으로 돌리는 누군가를 보면, 저 사람은 저 때 무모했겠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다. 얼마나 무르익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열매였던 걸까? 앞과 뒤를, 그리고 좌와 우를 두루 헤아리느라 저 사람은 지금 얼마나 바쁠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잠이나 잘 잘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사람이 보통 아래는 보지 않는다는 게 신기하다면 신기한 일이다. 


김치나 된장찌개 같이 냄새나는 음식은 피하고 초콜릿 같이 달달한 음식만 찾는 어른더러, '애기입맛'이라고 한다. 따지고 보면 김치나 된장은 상한 음식이다. 타인의 취향을 애기입맛이라 하는 내 자신을 보면, 긴 세월 지나 오느라 나는 이제 냄새도 제대로 맡지 못하고 맛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린 친구의 순진한 생각을 나이 탓으로 돌리는 이를 보면, 저 사람은 때가 참 많이 탔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나이 어린 그 친구는, 그렇다고 말하고 있는 자신의 미래와 조우하는 셈이니 얼마나 신비로울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슬플지도.


우리는 어떠한 세상에 편입된다고 하였다. '편입'이란 어떤 학년이나 학교에 도중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이 말을 보니 학력을 원인으로 삼는 우리의 모습도 그릴 수 있다. 시간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작용한다는 생각에서든, 아니면 우리는 모두 이미 존재하는 편에 서게 된다는 생각에서든. 우리는 종종 그렇게 말한다. 학사라 그래. 석사라 그래. 고졸이라 그래.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학부 때 얼마나 공부를 안 했을까 하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다. 저 사람은 대학원 때 논문다운 논문을 쓰지 않은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괜히 찔리는군. '돈 내면 다 주는 학위 뭐 하러 따냐?' 공부를 하지 않아도 학위를 준다면 나는 절대로 공부하지 않겠다 하는 다짐을 엿볼 수 있다. 학력을 용의선상에 올리는 일이 말로만 일어나면 참으로 다행이겠지만, 안타깝게도 학력에 따라 입직 경로에 차별을 두는 일은 아직도 흔하다.


"어린 놈이 수필은…." 교수 A의 그 말 역시 나의 졸작은 내 나이 탓이라는 말이다. 아직 생각이 무르익지 않은 탓에, 현상을 두루 살피는 습관이 부족한 탓에, 아니면 사물의 이치를 분별하는 힘이 부족한 탓에, 붓 가는 대로 쓰는 글(隨筆)은 결코 작품이 될 수 없다는 뜻이라 할 수 있다. 하긴, 나 역시 '내가 무슨 수필이야…' 한 적이 있으니, 그 말이 듣기에 거북한 것은 아니다. 문학상에 응모하기 전에는 내 글이 수필인지, 수필이 문학의 한 종류인지도 나는 몰랐으니 무슨 이야길 더 할 수 있을까 싶다. 얼른 나이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어, 그저 키보드만 두드렸을 뿐인데 작품이 하나, 즉 '수키(隨KEY)'라 할 만한 작품이 하나 뚝딱하고 나왔으면 좋겠다. A가 지금 생각할 수 있는 수준, 그 이상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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