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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j May 03. 2017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La bonne heure

저하게 집순이로 살고 있다.

림 그리는 일에만 초집중하면서.


일단 미니가 출근한 뒤에 나의 하루가 시작되는데

커피를 내리고 한국 뉴스를 듣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곤 그림을 그린다.

무엇을, 어떻게 그려볼지 아이디어를 짜내고

종이 위로 옮기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지치면 아무 때나 씻고,

물기가 채 마르기도 전에 다시 그림 생각.


그렇게 생각하고 그리고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오후 5시, 자체 퇴근 시간이다.

주부로 돌아갈 시간.

예전엔 미니가 저녁을 준비하는 날이 많았지만 회사를 옮긴 뒤론 통근 시간이 길어졌고 자연히 저녁 준비는 내 몫이 되었다.

한편으론 집에 돌아온 그를

맛있는 음식과 함께 짠! 하고 맞아주는  

온종일 일하고 집에 돌아오는 남편에 대한 내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했었는데...


 언젠가부터 내 안에서 부아가 났다.


 집중해서 해보고 싶은 프로젝트가 생겨도 뭐 하나 신중하게 그리기엔 5시라는 자체 퇴근 시간이  걸림돌이 되었다. 내 손이 느린 탓도 있겠지만 그림 좀 그려진다 싶으면 주부로 돌아갈 시간이었고 빨래하고 요리하고 밥 먹고 설거지하고 미니랑 이야기 좀 하다 보면 잘 시간.

게다가 미니는 절대 혼자서는 안 자기 때문에 나의 수면 패턴은 철저히 남편 위주다. 대학 때도 사회생활할 때도 야행성이던 난데

할 일 혹은 당장 하고 싶은 일을 놔두고 일찍 자야 하는 것이 좀 속상했다.

살면서 하루하루 시간이 이토록 빠르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게다가 나는 집순이니까 모든 것을 혼자 한다.

그림이 잘 그려지는 날엔 좋지만, 그렇지 않은 날엔 한 없이 우울해지면서 재능 없는 나란 인간, 이번 생엔 망했구나 싶은 좌절감이 끝없이 밀려온다.

집에서 혼자 창작하시는 아마추어 분들은 다 나와 같을까? 아님 성질 급한 나만 유독 이런 걸까...

주변에 그림이든 뭐든 창작하는 친구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자주 든다. 창작의 고통을 신랄하게 나누며 같이 맛있는 거 먹을...

위장은 나만큼 큰 친구. 하~ 갖고 싶다.

이런 기분을

술로 달랠 때도 있으나 그때뿐.

솔직히 술은 핑계고 주목적은 안주인건데

 이건 다음날 팅팅 부은 얼굴을 보면 바로 후회가 되니 좋은 방법이 아닌 거 같다.


그렇게 내면의 미친년 널뛰기, 기분의 업 다운이 계속되던 지난 월요일.


미니가 출근하고 커피를 마시려고 보니

있어야 할 곳에 커피잔이 하나도 없다.

컵을 가지러 가서 주방 문을 열어보고 깜짝!


일찌감치 샤워하러 욕실에 들어갔다가

또 한 번 깜짝!


주방 바닥도 그릇도 반짝반짝

욕실 바닥도 욕조도 반짝반짝


모두 다 빛이 났다.




(지난 주말)



나의 기분은 또 바닥을 기고 있었다.


만사가 귀찮았다.

그림도 맘대로 안 그려지고,

집안일도 지겨웠고...



그냥 널브러져 있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미니는 그런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지 않았다.

그리곤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했다.


아~ 얍삽한 나란 여자.

남편이 밥 차려 대령해 주니 기분이 또 좋아져서는 물개 박수를 치고 남편 최고를 외쳐댔다

실은 나를 다그치지 않는 남편이 고마웠다.

오늘은 내가 와이프!

주말 내내 미니는 내가 뭐 좀 하려고 하면,

"부엌에 오지 마. 오늘은 내가 와이프야!"

"우리집 아티스트는 가서 그림을 그려."

라며 나에게 최대치의 게으름을 허락해 주었다.


주말이 지나고 미니가 퇴근한 뒤의 월요일 아침,

반짝거리는 주방을 보고 욕실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시간이 너무 빨라.', '시간이 부족해.'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나.

반면에

미니에게선 단 한 번도 시간이 너무 빠르다거나 주말이 왜 이리 짧냐거나 하는 얘길 들어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사회생활하느라 나보다 몇 배는 더 고생하고 몇 배는 더 피곤할텐데 주말엔 늘 같이 장 봐주고 요리하고 청소하면서 피곤하다는 불평 한 번도 없는 남편. 성격 급하고 예민한 내가 운이 좋아 이해심 많은 사람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거울을 보니 웬 거지가 서있었다.

늘어난 티셔츠에 요가 바지,

한국에서 하고 온 펌은 다 풀어지고

대충 샴푸만 한 머리는 귀신산발.


인간다운 옷으로 갈아입고,

앞머리를 슥삭 자르고,

매니큐어를 발랐다.

그리고 특별히 3시에 자체 퇴근.

앞치마를 입었다.


이 날 준비한 요리는

요즘 남편이 너어어어무 먹고 싶다던 갈비찜.


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남편은 몇 번이나 엄지 손가락을 세우며

맛있다를 연발했고 고맙다고 말했고 남은 갈비찜은 다음날 도시락으로 싸갔다. 왜인지는 설명하기가 어렵지만 부터 인것만은 확실하다.

집에 오는 남편을 위해 요리하는 것이 다시 즐거워지게 된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도, 주부로 사는 것도 모두 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요즘 내 삶의 모습이다.

감정의 널뛰기를 맛볼 때도 있지만 나를 이해해주는 누군가가 있는 한...


집순이로 사는 것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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