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yoho Jul 02. 2022

나에겐 초능력 _ 다이어리

나의 영원한 로망






   겨울에 서점은 공기의 흐름이 다르다. 책과 책 사이 틈마다 새해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그곳에서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종류의 다이어리의 향연이 펼쳐진다. 나는 하나씩 꼼꼼하게 만져보고 열어보고 쥐어본다. 하지만 고르는 것은 늘 비슷하다. 다이어리는 연도와 날짜가 모두 적혀있고 더불어 주간 계획을 세울 수 있는 넉넉한 칸이 있는 것이 좋다.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내지도 필요하다. 크기는 손바닥만 한 정도. 색깔은 해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어느 해에는 검정이나 하양이 좋고 뭔가 변화를 주고 싶을 때는 쨍한 빨강을 고르기도 한다.

   우리 집 책장에는 고만고만한 크기와 두께의 다이어리가 쪼르르 쌓여있다. 많이 낡지 않은, 어쩌면 거의 새것에 가까운 것들이 가만히 놓여있다.

   나는 다이어리를 사는 것으로 일 년을 시작하고 쓰지 못함으로 마무리한다. 이것은 오래전부터 지속한 내 안타까운 습관이다.     


   다이어리를 사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사랑하는 사람들 생일을 적는 것이다. 매년 까먹지 않으면서도 굳이 쓴다. 음력으로 챙기시는 부모님 생신을 확인하고, 결혼기념일은 생일이 아니지만 특별히 적는다. 오래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던 친구의 생일 위에서는 주저하다가 적지 않는다. 하지만 늘 기억하고 있다. 누구나 살면서 쉽게 잊히지 않는 것들이 있고, 나에겐 그들의 생일이 그렇다. 사이가 멀어진 시간만큼 축하해줄 용기가 희미해졌을 뿐이다.

   생일예찬론자로서 제일 좋아하는 제브라 사라사 0.4 펜으로 각각 날짜 밑에 이름을 적으며 잠시나마 그 사람을 떠올린다. 적어도 이 사람들만큼은 올해도 어김없이 축하해주리란 다짐을 담으면서. 그리고 새해를 기다린다. 


   드디어 1월, 새로운 마음으로 주간 계획표에 일기 대신 그날의 감정들을 적는다. 그날그날 만난 사람과 장소 정도를 간단히 적기도 한다. 해야 할 일과 소소한 삶의 목표도 적어본다. 다이어리 맨 뒤편에는 올해 읽은 도서 목록도 기록한다. 길면 두 달, 짧으면 한 달 정도 그렇게 열심히 적다가 어느 날부터 서서히 뜸해진다. 그러다 환절기 감기를 앓듯 평소와 다른 며칠을 보내기라도 하면 그 후로는 다이어리라는 존재 자체를 까맣게 잊고 산다. 12월, 다시 연말이 다가올 때까지.     


   깨끗한 새 다이어리 위에 매일 겪은 감정들을 쓰다 보면 어느 날은 너무 기쁘고 또 어느 날은 너무 슬프다. 심하게 무기력한 날도 있고 거의 무(無)에 가까운 상태인 날도 많다. 다이어리는 누가 볼 것도 아닌데 그런 나를 마주하는 일이 어렵다. 너무 날 것 같은 나를 보면 도망치고 싶어 진다. 그래서 자꾸만 쓰기를 미루고 타인의 삶이 가득한 이야기책 속으로 달아나버린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약한 의지와 게으름이다. 이 정도면 안 사고 안 쓰면 될 일인데 내 마음은 연말마다 동동 뜬다. 우연히 SNS에서 멋진 일기나 달력 정리를 보면 더 그렇다. 여기서 멋지다는 건 꾸밈의 정도나 화려함, 글씨체의 깔끔함 같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채워진 기록의 밀도와 메모광, 기록광들에게서 느껴지는 단어수집 자체의 소중함을 의미한다. 적당히 낡은 표지에서 그 사람만의 자취가 엿보인다. 그들이 남긴 기록이 어마어마한 재산처럼 보인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정말 약도 없다. 그냥 다이어리 사기가 취미인 사람으로 남으면 몸도 마음도 편할 텐데, 나는 아직 그 정도의 내공이 없어서 자신을 비난하기 바쁘다. 


   누가 나에게 ‘다이어리 쓰기’ 숙제를 내줬으면 좋겠다. 매일은 부담스럽고 일주일에 한 번 혹은 이주에 한 번 정도 검사를 해주면 열심히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 삶을 모으고 싶다. 숙제는 정말 열심히 할 자신 있는데.






매거진의 이전글 나에겐 초능력 _ 정글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