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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진 Mar 18. 2022

빈 맥주병 네 개와 공병 제도

남자들의 일


독일 살면서 남편이 비틀비틀 취한 건 처음이에요. 회식 문화도 당연히 없을뿐더러 밤늦게까지 문 여는 술집도 드무니 밖에서 술 마실 일이 없어요. 한국의 회식 문화에 진저리를 치던 남편의 유일한 낙은 퇴근 후, 집에서 혼자 에어딩어 맥주 Erdinger Weiss Bier 한 병씩 홀짝이는 일이거든요. 그날은 어쩐 일인지 주인집 남자, 올리버가 남편에게 저녁에 시간 되면 만나서 '남자들의 일(술 마시자는 걸 이렇게 돌려 말해요)'을 하자고 권했어요.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 온 지 이제 막 1년이 지났던 터라 별로 친한 사람도 없는데 남편은 자기를 초대해 주니 한편으로 고맙기도 하고 독일인의 술 문화가 궁금해서 덥석 응했나 봐요. 


한국인에게 익숙한 외식 문화가 아니라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식사하고 술 마시는 문화가 발달한 독일 사람들은 집에 개인 바를 갖춘 경우가 꽤 있나 봐요. 저는 아는 독일인이 몇 없을뿐더러 술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서 본 적은 없지만 아들도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지하실에 아담한 바가 있다고 얘기해 줬거든요. 독일 주택의 구조가 지하실이 있는 경우엔 그곳을 사적인 공간으로 쓰거나 테라스를 전용 공간으로 만들어서 이용하나 봐요. 장소를 제공한 라히네 집도 테라스가 바처럼 잘 갖춰져 있더래요. 남자들의 일을 도모하다가 안주인을 마주치는 일이 없게요.   


이런 경우 어지간하면 안주 정도는 각자 챙겨 오나 봐요. 남편은 처음이라 멋모르고 그냥 몸만 갔는데 올리버는 소시지를 싸오고 디테는 치즈를, 자리를 제공한 라히네는 자기가 담근 술을 내왔대요. 그날 골목 남자들 넷이 모여서 저녁 시간 내내 술을 마셨는데 안주인을 만나지 못했고요. 독립된 공간이 있다는 게 마음에 들어요. 남자들은 자신들의 일을 자유롭게 수행하고 안주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아서 좋고요.




다음날 우리 집 남자는 침대에서 나오질 못하고 하루 종일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하며 괴로워하는데 자리를 제공하신, 연세가 좀 있으신 라히네는 남편이 두고 온 지갑을 들고 찾아오셨어요. 술도 약한 남편은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지갑을 놓고 온 줄도 몰랐던 거죠. 자꾸 왔다 갔다 하시길래 창밖으로 살펴보니 올리버가 가져왔던 소시지 담은 통은 올리버 집에, 빈 맥주병 네 병은 우리 집 현관 앞에 쪼르륵 세워 두고 가셨어요. 


빈 병은 뭘까 하고 의아해하며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전날 밤 중간에 맥주가 부족해서 자기가 몰래 뒷문으로 들어와 창고에 있는 맥주를 들고 갔다네요. 남편이 가져간 맥주의 빈 병을 돌려주신 거예요. 독일은 공병제가 굉장히 잘 돼 있어요. 맥주병은 가격(0.8센트)이 저렴하지만 음료수나 물이 담긴 플라스틱 용기는 살 때 미리 값을 미리 지불해요. 빈 플라스틱 용기는 0.25유로니 300원 정도로 푼돈이지만 모으면 꽤 요긴해요. 마트 앞에 공병 회수 기계가 있어서 한꺼번에 모아서 반납하면 금액 적힌 영수증이 나오는데 장 볼 때 주로 사용해요. 환경 보호 차원에서는 아주 확실한 시스템인 셈이죠. 그냥 허투루 버릴 일은 없게요. '공병 사냥꾼 Pfand Jäger'이라는 독일어가 있는데, 쓰레기통의 빈 병을 줍는 사람을 일컬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겨우 0.8센트 맥주병까지 정확하게 돌려주는 모습에서 저게 바로 독일인의 특징이지 싶어요. 공과 사는 정확하게 구분 짓고 특히나 돈과 관련된 건 빈틈이 없어요. 함께 술을 마신 네 시간 동안 그동안 몰랐던, 처음 듣는 각자의 집안 얘기들이 꽤 오간 모양이에요. 덕분에 은근히 친해졌는지 요즘 올리버가 뭘 자꾸 줘요. 원래도 친절한 주인집 남자가, 신발장과 TV 받침대를 주더니 카펫 청소하는 기계를 하루 빌렸는데 필요하면 쓰라고, 세제까지 써도 된다면서 친절을 베푸는 거 있죠.


신발장도 TV 받침대도 최대한 안 사고 버티길 잘했어요. 하루 저녁 술을 마셨다고 부쩍 친절해진 모습에 남편에게 올리버랑 도대체 그 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캐묻는데 말이 없길래, "이 동네 토박이 남자 셋의 술 모임에 당신을 끼워 준 것도 좀 웃긴데, 당신이 퍽 마음이 든 모양"이라고 놀렸어요. 빈 병까지 칼같이 돌려주는 모습에서 한국인이 말하는 ‘정'은 느끼기 힘들지만, 도움이 필요한 순간엔 의리 있게 도와주고 챙겨주는 모습을 보면 아주 매정한 건 아닌 것 같고요. 어떤 면에선 정은 눈 씻고 찾아도 없다가 또 어떨 땐 합리적이구나 싶기도 해서 알쏭달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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