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 사소한 독립의 시작

by 김유진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의 아내 역인 임수정은 매사 불만이 가득하고 투덜거리기 일쑤다. 임수정이 점점 자신을 찾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녀가 용기를 내서 운전을 처음 한 날, 백미러도 펴지 않은 채 밤길을 달려와 속초에 사는 남편에게 반찬을 전해 주며 말한다.


"장롱에서 운전면허 꺼낸 것처럼

그 안에 꽁꽁 가둬놨던 것 다 꺼내려고

꿈도 꺼내고 희망도 꺼내고 용기도 꺼내고

그러면 좀 더 괜찮은 아내가 될 것 같지 않아?”


임수정 대사를 듣다가 처음 운전하던 날이 떠올랐다. 엄마가 되기 전에는 상상하지 못한 일을 해야 하거나 용기를 발휘해야 할 순간이 꽤 있다. 나에겐 운전도 그중 하나다.


오래전 아이 둘을 데리고 버스를 탄 엄마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잠이 든 작은 아이를 업고 큰 아이 손을 잡고 짐까지 든 한 엄마에 대한 짠한 마음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애가 둘이면 저렇게 다녀야 하는 건가. 체력 부실한 나는 겁부터 났다. 외출은 꿈도 못 꾸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웬걸, 엄마가 되니 없던 힘이 생긴 건지. 아이와 배낭을 앞뒤에 동시에 메고 휴대용 유모차까지 번쩍 들고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는 나를 보면서 깜짝 놀랐다. 잠이 들어 천근만근이 된 아이를 안고 집에 와야 할 때도 있었다.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힘’들이 불끈불끈 솟았다. 덕분에 팔뚝은 엄청 굵어졌다.




신혼 초엔 장롱에 면허증을 고이 모셔둔 채 운전을 못 했다. 조금만 먼 곳으로 일을 보러 가더라도 남편에게 부탁했다. 장보기뿐 아니라 볼 일이 있으면 남편을 기사처럼 정중히 모시고 다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하긴 로망 중 하나는 마트에서 남편 팔짱을 끼고 카트 밀면서 장을 보는 일이었으니까. 신혼 때로 충분하다. 이젠 웬만하면 사람 많은 곳에 남편하고 같이 갈 일은 만들지 않는다.


남편에게 의존적인 여자로 사는 건 아닐까 생각된 어느 날, 장롱에 갇힌 운전 면허증에 다시 한번 빛을 볼 기회를 주기로 했다. 경적에도 심박수가 빨라지고 옆 거울을 볼 여유를 상실하고 무조건 직진에 겁 많은 길치가 몇 번의 주행 연습을 하고 도로에 처음 나간 날 무서워 심장이 오그라드는 줄 알았다. 그런데도 죽음을 무릅쓰고 운전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형부의 이 한마디의 영향이 컸다. “처제, 동네에서 운전하다가는 어지간해선 안 죽어” 죽을까 두려웠던 게 사실이지만 눈 찔끔 감고 용기를 냈다. 한 번 용기를 내니 처음은 무서웠지만, 기동성이 생기고 덜 의존적이며 자는 아이를 들쳐 메고 짐까지 들고 다닐 일이 줄었다.


둘째 아이가 절대 양육 기간을 지나 유치원에 간 이후, 3월 첫 강의를 하게 된 도서관은 우리 집에서 20km나 떨어진 곳이었다. 운전을 못 했다면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가기 힘든 곳이다. 지방 가는 느낌이랄까. 운전경력 10년 동안 고속도로 한번 타보지 못했고 사는 동네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10km 이상은 운전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용기가 필요했다. 강의가 시작되기 전에 남편과 미리 사전답사를 갔다. 그 이후 일주일에 한 번씩 삼 개월간 꼬박 가면서 운전 솜씨가 많이 늘었다. 출발 전에 운전대를 잡고 기도가 필요할 정도로 처음엔 무서웠지만 이제 더 먼 곳도 갈 만큼 자신감이 생겼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정겹고 어깨가 저절로 펴지는 날, 나만의 공간으로 변신하는 차 안에서 음악을 들으며 강의하러 가는 기분은 꽤 좋다. 전용 헬기를 타고 날아가는 기분이랄까. 처음엔 죽을 만큼 무섭고 겁이 났지만 눈 질끈 감고 용기 내어 운전하길 참 잘했다. 장롱 면허를 꺼낸 것처럼 그렇게 하나씩 용기도 꺼내고 꿈도 꺼내고 희망도 꺼내다 보면 나도 점점 더 괜찮은 사람이 되지 않을까. 장롱 면허 하나 빛을 보게 했을 뿐인데 이렇게 자신감이 상승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