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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모 Oct 11. 2022

그리는 즐거움


"작가님은 처음부터 그림을 잘 그리셨나요?"


강연을 하거나 행사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면 가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여전히 부족함이 많다고 생각하기에 위와 같은 물음 앞에 서면 부끄러워져요.


돌이켜보면 저는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학생이 아니었습니다. 곰곰이 떠올려보면 미술학원을 다니지 않았음에도 높은 완성도의 그림으로 저를 놀라게 한 친구들이 참 많았어요. 저는 그림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저의 미래를 설계하기 어려웠어요. 저의 고민을 알아차리고 그림의 길을 먼저 제시해주는 사람 또한 없었죠. 잠깐의 방황을 끝내고 선택한 길은 공대생이 되어 엔지니어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경쟁하는 그림을 그리기 싫어 미대 입시를 하지 않았어요. 그로 인해 그림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제가 좋아하는 그림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할 수 있어서 다행스러웠어요. 학부생 시절에는 벽화 봉사활동에 참여하거나 학생회에서 학내외의 이슈를 만화로 풀어내는 작업도 진행했었는데요, 결과물은 다소 조악하더라도 사람들과 그림을 매개로 소통하는 그 과정이 무척 즐거웠습니다.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해요. 저는 이러한 유쾌한 경험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그릴 수 있는 체력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사회인이 되고 나서 신경 쓴 부분은 일과 그림의 밸런스를 맞추는 일이었습니다. 야근이 많은 회사였지만 의외로 짧은 여행을 할 수 있는 여유가 많이 주어졌어요. 그림과 여행이 결합된 형태의 직업을 꿈꾸게 된 것이 그때부터였죠. 행복한 여행의 순간들을 그림으로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반복된 즐거운 경험은 저를 자연스럽게 여행드로잉 작가라는 새로운 직업으로 이끌어주었어요.


옛 그림들을 다시 찾아보니 잊었던 그 시절의 기억들이 하나둘씩 생생히 되살아나네요. 첫 번째 그림은 제 생애 최초로 여행 중에 남긴 드로잉입니다. 대학 학부생 시절인 2008년 겨울에 일본 후쿠오카를 혼자 여행했는데, 그때 현장에서 그린 하카타 타워 풍경이랍니다.




초반에는 펜 스케치 위주의 그림을 많이 그렸어요. 그러다가 2014년부터 제주도의 자연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연필 스케치 후 수채물감으로 채색하는 방식으로 조금씩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옛 그림을 들춰보는 것으로 저의 그림체가 변화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어 재미있네요.


빨리 잘 그리고 싶은 마음만 많았다면 이렇게 오래 즐겁게 그리지 못했을 것 같아요. 그림을 취미로 하시는 분이라면, 기술적으로 능숙하지 못해도 나에게 의미 있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 그림을 많이 그리셨으면 좋겠어요. 켜켜이 쌓인 그 즐거운 시간들이 마침내 여러분을 성장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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