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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큐져니 Jun 11. 2018

아이의 절박함은 증거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증거, <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어린 시절, 가기 싫은 곳을 가야만 했을 때의 감정은 누구에게나 생생하게 남아있다.

집이 아니면 달리 갈 곳도, 돈도 없는 작은 아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절박함의 표현은 그 장소에 가지 않는 것이다. 최후의 수단이다. 그만큼 그것은 참 간절한 행위다.


그런데 그 가기 싫은 곳을 아이가 스스로 걸어간다. 그 끔찍한 감정으로 스스로 걸어가는 것도 모자라,

정작 가고 싶은 곳은 빙빙 돌아, 가지 못하게 막는다. 그러다 온 힘을 다해 도망간다. 하지만 이내 다시 자신의 두 발로 그 가기 싫은 감정으로 되돌아간다.


나는 최후의 수단에서 더 나아간 이 절박함의 감정이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Custody)> (자비에르 르그랑, 2017)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이의 어깨 뒤에 서 그 너머로 시선을 맞추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 어깨는 참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아이의 어깨는 정말 많은 것들을 담고 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Custody)> (자비에르 르그랑, 2017)


언젠가 이 어깨를 보았던 적이 있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어깨를 정말 많이 보아왔다. 외면했을 뿐.

그렇지만 유독 한 아이가 계속 떠올랐다.

 

<독일영년 (로베르토 로셀리니, 1948)>


전쟁의 폐허 속에서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떠돌던 아이.

아이는 어른이 남긴 가장 이기적이고 잔인한 폐허를 고스란히 그 어깨에 올린 채 집 밖을 맴돌았다.

병약한 아버지를 스스로 떠나보낸 아이는 건물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Custody)> (자비에르 르그랑, 2017)

"다행히" 반 세기 뒤의 발전했다 일컬어지는 사회는 적어도 아이에게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을 스스로 떠나보내기를 강요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아이는 자신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절박함이란 감정을 이용한다. 끔찍함 속 나오는 최후의 행위를 이어간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Custody)> (자비에르 르그랑, 2017)


그리고 여전히 우리 사회는 아이의 이 간절함을 증거로 받아주지 않는다. 모든 약자들에게 그러하듯, 우리 사회는 아직도 잃는 게 없는 사람의 잃음을 방지해줄 증거를, 이미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잃은 이들에게 강요한다. 그리고 그것이 허용하는 증거는, 반세기가 지나도 변함없이 이 약자들의 목숨이다.


“영영 안 보면 좋겠어요. 그게 다예요”


<아직 끝나지 않았다(Custody)> (자비에르 르그랑, 2017)


우리는 언제쯤 이들의 목숨과 그 반대 위치의 위선, 품위, 욕심 사이의 추의 수평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2018. 06. 04

어깨 너머와 문 구멍, 달리기


다큐져니

[옆동네산책]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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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Custody)> (자비에르 르그랑,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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