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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재용 Feb 16. 2024

산이 하는 말을 번역하다

출간 후 연재 '알피니스트' - 1

이젠 다 알았다 싶을 때 멀어지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우리 삶이고, 다른 하나는 각자의 무엇이다. 각자가 가진 나머지 하나, 영원히 잡히지 않고 특정할 수 없는 개별적인 ‘그 무엇’이 산인 사람들이 있다. 십여 년 전, 직장인 신분으로 3개월이 걸리는 에베레스트 원정을 두고 사직서를 낼까, 휴직서를 낼까, 갈까 말까를 고민
하느라 이틀 밤을 새운 적이 있다. 흉할 정도로 입술이 부르텄었다. 빙벽을 오르다 추락해 왼쪽 발목뼈가 으스러져 스물일곱 조각 난 지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뼈도 붙지 않은 때였다. 가지 말아야 하는 이유 수백 가지를 늘어놓고서도 나는 그 인화성 짙은 운명을 피해 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불같은 화살이 내 핏줄을 타고 지나갔다. 산은 도대체 무엇인가, 기꺼이 삶을 몰락으로 몰아넣었던 밤이었다. 그 밤 이후 내 삶은 불길에 휩싸였고, 태풍으로 빨려 들어갔다. 흔들리고 날아가 타고 잿더미가 되어 부서져야 마땅한데, 나는 멀쩡했다. 오히려 그 안에서, 삶이라는 태풍의 눈 한 가운데서, 그 고요하고 적막한 부동의 중심축을 보았다. 그렇게 산은 나를 살렸고보우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해도 죽지 않았다.”

산은 자신의 속살을 활짝 열어 보이며 이 명징한 사실을 내게 알려주는 듯했다. 산은 이런 거였구나, 하고 어리석게도 나는 산을 안다 생각했다. 그럴 때면 순간, 산은 그 몸을 이내 닫아버렸다. 그러나 산이 자신에게 범접해 들어오는 인간을 허락하지 않을수록 멀어지는 산을 미치도록 알고 싶었다. 신과 대항하며 껍질이 벗겨져도 미소 지었던 마르시아스▲, 신의 번개를 열망하다 그 휘황함에 불타 죽은 세멜레▲▲, 태양신의 마차를 몰다 추락하며 종말을 맞은 파에톤▲▲▲처럼, 산이 자신을 철저하게 감출수록 나는 파멸을 감수하고 산의 진의를 보려 달려들었다.


▲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수의 정령. 아폴론과 연주 실력을 겨뤘으나 패배하여 중벌을 받는다.

▲▲ 제우스의 아이를 잉태했으나, 제우스의 본 모습을 보고 싶다는 소원을 빌어 번개에 타 죽는다. 훗날 아들(디오니소스)이 자하세계에서 구출해 여신으로 승격된다.

▲▲▲ 아버지인 태양신 헬리오스의 태양 마차를 무리하게 몰다 결국 제우스의 벼락을 맞아 죽는다.


볼 수 없는 것을 보려 했다. 산을 오르는 일, 목숨을 내놓고 또 올라가려는 욕망, 산을 향한 열정 같은 것들은 적어도 나에게는 객관적일 수 없다.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산 안에 있는 사람의 눈으로는 산을 객관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산을 생각해도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 솟아날 무엇이 없고, 더는 산과 무관해지고
난 뒤라야, 시선은 맑아지고 산을 편안하게 조망할 수 있는 눈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안에 서식했던 열정도, 희망도 부끄러움도 절망도, 다 타버린 재를 보듯 그저 타올랐을 때를 추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한, 그것은 세계의 합리성과 이러저러한 결정론 너머에 있음이 분명하다. 산을 생각하면 곧 휘몰아치는 열정과 사무치는 마음이 산을 객관화해서 보려는 시선을 흐리고 만다. 그러니까 나는 삶 안에서 살고 있으므로 삶을 똑바로 볼 수 없고 마찬가지로 여전히 산 안쪽을 어슬렁거리므로 산을 알 수 없다. 다시 말해, 내 삶이 알 수 없는 힘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곳이자 삶의 의미 안쪽과 바깥쪽에서 모여들고 흘러 나간 곳이 바로 산이다. 


“산이 하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산은 말을 할 수 없으므로 인간의 말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산을 치열하게 오른 자들의 말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이유이다. 그들은 아마 산과 닮은 몇 안 되는 인간이지 않겠는가. 그런 그들의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피와 같은 말들을 흩어지지 않게 갈무리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곧장 등반사를 통째로 뒤져 7명의 길 아닌 길을 갔던 사람들을 찾아냈다. 기라성 같은 수많은 산악인들 속에 파묻혀 지낸 시간이 기뻤다. 선험의 관념들, 시대와 불협하며 새로운 길로 들어서기를 기어코 감행한 자들이 말하는 말 너머의 말, 그들이 뿜어내는 몸의 언어를 곱씹어 읽고 연구했다. 가슴에 산이 들어앉은 인간들이 자기 삶 전체를 욱여넣은 뒤 마침내 포효하며 뱉어낸 단 한마디, 그 휘발하는 말들을 붙잡고 당황과 흥분의 불을 댕겼다. 그들이 자신의 전 생애를 관통하며 삶과 맞바꾼 언어는 그들 삶의 뼈와 살이었다. 산에 기댄인간의 내면이 말하는 생생함이 가득한 그들의 언어는, 시골 잔칫날 돼지 멱을 따고 그 아래 받쳐 든 사발에 쏟아지는 붉은 피와 같아, 나는 그들의 선홍빛 언어를 소중하게 흠향하고 싶었다. 


저 도저한 무를 향한 돌진은 산을 오르는 인간의 마음이다. 적막속에서 시커멓고 까마득하게 뻗은 검은 벽을 새벽에 홀로 오를 때, 이 세계의 고요에 흠집을 내는 아이젠 소리, 얼음 짝을 파고드는 피켈은 순백의 소리 없는 몸짓이다. 귀청을 때리는 고요, 적막의 메아리가 울려 퍼지지만, 까마득한 아래, 저곳은 오늘이 수요일이다. 그곳에는 문자도 있고 빵도 있겠지만, 오로지 무를 향해 미끄러져 들어가는 수직의 벽에는 살아있다는 존재의 한 종자만이 있을 뿐이다. 죽는 줄 알면서도 달려드는 처절한 경험이 각인된 인간의 몸은 산에 다시 새겨진다. 그것은 낭만과 로망의 언어로는 설명될 수 없을 것이고, 사유나 논리의 언어 위에 있는 몸의 언어일 터인데, 그 감전의 전압이 흐르는 언어를 잡고 삶 전체와 맞서는 말의 에너지를 감당할 수 있기를 나는 소망한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말은 늘 글자로 넘어설 수 없는 지점에 존재했다. 오랜 시간 그들에게 어울리는 언어와 적당한 말을 고민하던 내 눈물겨운 노력은 이제 그 한계를 알고 내려놓는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다. 말하지 않는 산에 대고 떼를 쓰고 어리광을 부려 억지 말을 부려 놓았으니, 훗날 이 유치함을 어찌 감당할까. 다만 위안으로 삼는 건 나도 그들 유의 인간, 맨몸으로 박치기하듯 산을 향해 자기 몸을 부수고 들어가는 인간의 지엽말단 말석에 짐짓 모르는 체하고 앉아 있는 내 뻔뻔함과 함께, 그들과 같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공통분모다. 말이 닿지 못하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희미하게 본 것만으로 내 복은 다 지었다 여긴다. 


- 알피니스트, 드루, 202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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