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현석 Sep 30. 2018

오해가 오예가 되는 그날까지

오매불망(寤寐不忘)


    ‘아, 답답해. 말이 안 통하네.’라는 감정은 언어가 통하지 않는 다른 나라에 가야만 느끼는 감정은 아니다. 같은 민족끼리 같은 언어를 쓴다고 해도 말이 안 통할 때가 더 많다. 서로 생각이 달라서? 아니다. 그건 이유가 될 수 없다. 서로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말이 생겼을 테고 의사소통이 중요한 거니까. 의사소통이 안 되는 이유는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의 생각이 다름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오히려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이나 다른 민족과 더 얘기가 잘 통할 때가 있다. 국가적 혹은 언어적 사대주의라기보다는 서로 다르다는 것이 이미 표면적외모적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에 나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그 ‘다름’을 쉽게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다양한 생각과 사상이 공존하는 현시대에 의사소통의 중요성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강조된다. 초등학생부터 대학생, 직장인, 청와대에 있는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꼭 필요한 능력으로 대두되고 있다. 꼭 말을 조리 있게, 기승전결에 맞춰서 해야 한다는 교과서적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내 영어 실력이 좋지 않아 문법적으로는 많은 부분을 틀려도 해외여행에 가서 먹고 자는 데 큰 불편함이 없는 걸 보면 소통에 중요한 건 그게 아닌 것 같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상대에게 제대로 전달하려는 의지가 중요한 게 아닐까. 물론 문법과 단어의 사용이 크게 잘못되면 안 되겠지만.


    소통의 기본은 상대를 알고자 하는 마음이다. 알고자 하는 마음과 알리고자 하는 마음은 사람의 기본 심리다. 그렇기에 누구나 상대의 마음을 알기 위해 애를 쓴다. 특히 연애할 적에 유독 심할 것이다. 나 역시 상대의 마음을 파악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연애심리에 관한 책을 다양하게 읽어봤지만 이렇다 할 만한 정답을 찾지 못했다.


    한때는 몸짓으로 상대의 심리를 파악하는 책이 유행이라 읽은 적이 있었다. 저명한 학자들이 실험을 통해 알아낸 연구 결과에 심리학적 근거를 들어 몸짓의 속뜻을 풀어놓았다. 현재는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내용으로 스스로 팔짱을 끼는 것은 방어적인 태도, 상대 쪽으로 상체를 기우는 것은 관심이 있다는 표현, 눈동자를 위로 굴리면 거짓말을 생각하는 것이라거나 주머니에 손을 넣는 것은 자신감의 표현이며 입을 가리는 것은 얘기를 그만하고 싶다는 것이라는 등의 내용이 실려 있었다. 줄까지 그어 가며 숙지했었지만 다 읽고 나니 별로 믿음이 가지 않았다. 일단 나는 팔짱을 끼거나 주머니에 손을 넣는 습관이 있는데 그건 방어적이거나 자신감의 표현이 아니라 그저 손이 어색한 게 싫었을 뿐이었다. 내게는 그런 행동이 방어적인 표현이 아니라 단순히 둘 데 없는 손을 고정하는 방편에 불과했다.


    같은 행동이라도 심리 결과가 다르게 나오는 책도 있었다. 결국 책에만 의존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영화 〈왓 위민 원트〉의 주인공 닉 마샬처럼 사람의 속마음이 들렸으면 참 좋겠다는 허무맹랑한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 초능력이 없는 나로서는 대놓고 묻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물어봐서 궁금함이 해결된 적이 더 많았다. 결국 서로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솔직한 대화만한 것이 없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생각을 가감 없이 상대방에게 털어놓는 것이 물론 쉽지는 않다. 상대에게 속마음을 보였을 때 상대도 똑같이 속마음을 보여줄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왠지 나만 내 숨은 패를 보여주는 것 같다. 전쟁터에서 갑옷 벗고 무기 버리고     혼자만 맨몸으로 싸우는 듯한 느낌까지 들기도 한다.


상대에 대한 믿음이 충분치 않아 상처받는 게 두렵겠지만 방법이없다. 자기방어와 선 긋기는 연애나 인간관계에 걸림돌이 될 뿐이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려면 상처받을 각오도 필요하다. 헤어짐을 염두에 두라는 말이 아니다. 상대의 사소한 말 한마디나 행동 하나에도 상처받기 쉬운 나약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다가가자는 말이다. 그래야 오해를 줄일 수 있다. 굳이 연애할 때가 아니어도 살면서 무수히도 많은 오해가 생긴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선생님 : 야야, 철수 인마 어디 갔노?

학생들 : …….

선생님 : 철수, 어디 갔노 말이다!

학생 1 : 시끄러요.

선생님 : 뭐라꼬?

학생 1 : 시끄러요.

선생님 : 이놈이, 나와!

학생 1 : 시끄러요. 손 시끄러 화장실에 갔다고예.


    오해의 단면을 보여주는 옛날 옛적 유머다. 소통은 이렇게 오해를 동반하기도 한다. 모든 드라마나 영화에 오해는 필수 요소다. 등장인물 간의 갈등은 반 이상이 오해 때문이다. 가족, 친구, 연인처럼 가까운 사이일수록 오해가 더 쉽게 쌓인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줄 거라고 기대하고 믿기 때문이기도 하고 가깝기 때문에 오히려 대화가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도대체 오해는 왜 생기는 걸까? 오해한 사람이 잘못한 걸까? 오해하게 만든 사람이 잘못한 걸까? 이런 잘잘못을 따지다 보면 오해의 골은 더 깊어질 뿐이다. 오해가 생긴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이유에 대해선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자. 서로 맞지 않아서 생기는 것은 아니다. 싫어서, 미워서 생기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저 매끄러운 커뮤니케이션에 저항하는 마찰력이라고 생각하자. 시간이 흐르면서 산화되어 생기는 녹이라고 생각하자. 누구의 잘못이 아닌 자연의 섭리인 것처럼. 하지만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 오해는 먼지와 같아서 신경 쓰지 않고 있으면 켜켜이 쌓인다. 수시로 오해의 먼지를 닦아줘야 한다. 혼자 닦을 수도 없다. 유리창 닦듯이 내 쪽의 오해는 내가, 상대의 오해는 상대가 닦아야 한다. 내가 보는 것이 상대가 보이고자 하는 것이었는지 꾸준히 대화하며 알아봐야 한다. 오해는 방치하면 주머니 속의 이어폰처럼 더 엉키게 될 뿐이다. 풀기 어려울 정도로 엉키기 전에 서로 풀어줘야 한다. 서로 연결되어 있어 그만큼 가깝기에 쉽게 엉키는 것이라고 자위하며….


    서로 보는 곳의 각도를 맞추고, 발걸음의 속도를 맞추듯 말하고 듣는 것의 정확도도 맞춰야 한다. 박쥐나 돌고래가 초음파로 사물을 확인하는 것처럼 결국 우리는 대화로 서로를 알아가야 한다. 5-3=2 라며 어떤 오해(5)라도 세 번(3)을 생각하면 이해(2)할 수 있게 된다는 개소리를 믿지 말자. 혼자 고민하고 생각해선 어떤 오해도 깔끔하게 해결할 수 없다. 결국 대화밖에 없다.







오매불망 :  해는 듭 같아서 바로 풀지 않으면 신불만이 뒤엉켜 관계를 친다.

자나 깨나 말조심, 자나 깨나 오해 조심하면 백년해로 할지어다.


이전 02화 내 안의 내진설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