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두절미(去頭截尾)
밖을 나서니 아직 쌀쌀하지만 햇볕은 참 좋다. 거리에는 벌써부터 제2의 벚꽃 연금을 노리는 듯한 노래들이 들려온다. 의도야 어떻든 화사한 봄날에 봄 노래를 듣자니 하릴없이 마음이 설렌다. 몇 주만 지나면 사방에 눈부신 벚꽃과 함께 눈꼴신 커플들도 만개하겠지.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근 몇 년 동안 벚꽃이 만개할 즈음마다 비가 왔던 거로 기억한다. 그것도 벚꽃 축제 기간 초반에. 딱히 비가 오길 바란 것은 아니었으나 내심 꼬시다는 못난 생각을 했었다. 벚꽃 까짓것 우리 아파트 단지에도 많이 피는데 굳이 사람 바글바글한 축제까지 갈 필요가 뭐가 있냐며 자기합리화를 하다가도 막상 가면 좋긴 하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사람은 이리도 쿨하기가 힘들다. JTBC의 〈마녀사냥〉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성시경이 한 말이 있다. “쿨한 척하는 것들은 다 ‘쿨 몽둥이’로 맞아야 한다”고. 누군가를 상대하는 태도로는 쿨한 척을 하기보다 진심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도 한때 쿨한 척을 부단히도 했다. ‘그럴 수도 있지. 이해해. 괜찮아. 난 아무렇지도 않아. 그거 말고도 신경 쓸 일이 많아. 별로 관심 없어.’ 남을 이해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결국은 내가 상처받기 싫어서 그런 거였다. 다 부질없는 행동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뭐든 자기감정에 솔직한 게 최고다.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스무 살 때는 낯을 많이 가렸다. 말수도 적고, 감정 표현도 서툴렀고, 대화할 때 상대방의 눈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하고, 다른 사람이 하자는 대로 따라가기만 했다. 이런 성격이 싫고 답답해 고치고 싶었다. 그러던 중 한 친구가 임도 보고 뽕도 따는 좋은 치료법을 생각해냈다. 대담해지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번화가에 가서 헌팅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지금은 어디가 핫플레이스인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이나 강남 뉴욕제과 앞이 헌팅 장소로 가장 핫한 곳이었다. 아마 그때가 햇살 좋은 봄이었던 거 같다. 역시 핫플레이스답게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벌써 십수 년이 지났는데도 글을 쓰면서 그때 기억을 떠올리니 괜스레 떨린다. 친구들에게 졸보라고 놀림당하기 싫은 마음에 그나마 까칠하지 않을 것 같은 여성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결과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그렇게 해가 지고 저녁에는 술집에 가서 같은 짓을 또 시작했다. 그때 그 친구들을 만나면 종종 그러고 놀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했던 짓을 통해 배운 것은 말 거는 기술이 아니라 거절에 익숙해지는 법이었던 것 같다. 말을 못해서 여자에게 말 걸지 못하는 게 아니고 거절이 두려워 말을 걸 시도를 못하는 게 더 크다는 의미이다. 그 후로 군대를 다녀오고 성격이 많이 바뀌었다. 예전보다 훨씬 뻔뻔해졌다. 일화를 하나 얘기하자면, 나는 지하철을 타고 어디를 향해 가던 중이었는데 옆 좌석에 앉은 여자가 “껌 먹을래?”하고 말을 걸어 와서 쳐다보니 당연하게도 나한테 한 말이 아니라 그 옆의 친구한테 한 말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민망해서 얼른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을 텐데 그때는 민망함을 정면 돌파하고 싶었는지 “저도요”하면서 그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여자는 나를 한번 쓱 쳐다보고는 껌을 하나 내주었다. 나는 “고맙습니다”하고 아무렇지 않게 껌을 받아 씹었다. 지금은 하라고 해도 절대 못할 행동이다. 친구들에게 무용담 비슷하게 해줄 에피소드를 만드는 데 혈안이 되어 있던 때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사실 거절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취지의 글을 쓰려고 했다. 그런데 거절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작정 밀어붙이는 상대를 만나면 당사자는 얼마나 당황스러울지 거꾸로 생각해보았다. 요즘은 거절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보다 오히려 거절을 잘 못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나 또한 그랬었고. 심리학계에서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라고 부르는데,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을 감추고 타인의 기대에 순응하는, 마치 부모에게 착하다는 칭찬을 받으려는 아이 같은 심리를 말한다. 어릴 때부터 착한 게 미덕이라고 배우며 자라서인지 오랫동안 이 콤플렉스를 벗어나지 못했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도 친구들이 하자고 하면 같이 하고, 다른 걸 먹고 싶어도 이거 먹자고 하면 그러자 했다. 굳이 싫다는 말을 해서 관계가 어색해지는 게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대학 때 심리학 수업을 들은 것을 계기로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볼 수 있었고, 문제를 인식하고 나니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 수업의 과제 중 하나는 나를 아는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제3자를 통해 물어보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야, 너 현석이 알지?”
“응. 알지.”
“걔 어떤 거 같아?”
“뭐가?”
“성격이나, 뭐 그런 거.”
“걔? 그냥 착해.“
친구를 통해 조사해본 바로는 대부분의 지인에게 있어 나는 그냥 착한 애였다. 나는 평생 다른 사람에게 ‘그냥 착한 사람’으로 인식되는 걸 원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았고, 내 대답은 ‘아니오’였다. 아무도 내 진짜 성격이 어떤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물론 착하기도 하지만 그게 나라는 존재를 표현할 형용사의 전부는 아니었다. 이런 적도 있었다. 과에서 MT를 간 적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그때 내가 같이 갔었는지 기억을 하지 못했다. 나는 그들에게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이 기억을 못한다고 꼭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라는 건 아니지만 그때의 나는 그렇게 판단했다.
좋아하던 이성에게 고백했다가 이런 말도 들었다. “넌 착하긴 한데 재미가 없어. 매력도 없는 거 같고.”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그 비슷한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 후로 조금씩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결정하기 시작했다. 내가 진실되게 행동하지 않았기에 아무도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행동을 바꿔봄으로써 처음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나는 생각보다 앞에 나서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평소에 앞에 나서는 애들을 보면 나댄다고 비하하면서 싫어했는데 사실은 내가 하고 싶은 걸 그 애가 대신해서 질투가 났던 거였다. 나도 나를 모른다는 말, 인생은 평생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말이 격하게 실감 나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도 나를 알아가는 중이다.
상대가 나에게 원하는 바가 있어 부탁을 했다. 하지만 내가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 거절을 했다. 단순하다. 거절했다고 해서 미안할 일도 아니고 거절을 당했다고 해서 미워할 일도 아니다. 거절하는 것은 자기주도적 삶을 살겠다는 다짐이다. 남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도 알고 상대방도 알게 된다. 주변에 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생각해보길 바란다. 거의 없다면 그건 사람들에게 당신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 아닐까? 마지막으로 착한 아이였던 나를 당당한 어른이 되게 한 책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넌 착한 아이 콤플렉스구나?”
“그게 뭔데?”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칭찬받고 싶고 아무에게나 미움받거나 비난받고 싶지 않은 거.”
“생각해보면 그런 것도 같다.”
“넌 그냥 너야. 누가 널 사랑하지 않는대도 널 미워한대도 어쩔 수 없어.
그건 그 사람 사정이고 넌 그냥 너일 뿐이니까. 너무 힘들어하지 마.”
- 《어느 특별했던 하루》, 한혜연
싫은 부탁은 설명, 변명 다 자르고 단호하게 거절해야 다신 하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