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다망(公私多忙)
카피라이터가 되기 전 나는 IT 회사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한 적이 있다. 데이터베이스 관련 자격증이 몇 개 있었지만, 개발은 전혀 할 줄 몰랐다. 기껏해야 웹 개발 쪽의 HTML과 PHP를 조금 다룰 줄 알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 정도 알고 있으면 나머지는 일하면서 배우면 된다며 날 흔쾌히 개발자로 뽑아준 회사가 있었다. IT 업계 쪽에서 나름 큰 회사였기 때문에 많이 배우려고 노력했다. 그 회사를 그만둔 후에는 광고계로 넘어왔기 때문에 그때 배웠던 개발 관련 기술은 별 쓸모가 없게 되었지만, 어느 업계에서든 적용할 수 있는 큰 배움을 얻었다. 바로 공과 사는 남녀처럼 유별해야 한다는 것.
IT 회사에 다닐 당시 내 명함엔 프로그래머라 적혀있었지만, 정작 나는 C언어(프로그래밍 언어)의 첫걸음인 Printf 구문도 알지 못했다. 입사와 동시에 컴퓨터 학원에 다녔다. C언어 프로그래밍 기초반이었다. 이해력이 부족해서 같이 배우던 고등학생들에게 알려 달라고 매달렸다. 업무 시간에도 바쁜 선배님들 자리로 가서 모르는 걸 질문하기 일쑤였다. 커피도 타다 드리고, 제대 후 끊었던 담배도 같이 피우러 나가면서 어떻게든 잘 보여야 그나마 조금이라도 알려주곤 했다.
개발팀장님은 PC게임을 좋아하셨는데 어느 날 건담 대전이라는 게임을 팀원들에게 같이 하자고 제안하셨다. 퇴근 후 컴퓨터 학원에 갔다가 집에 도착하면 부랴부랴 그 게임에 접속했다. 상사에게 잘 보여서 다음 날 프로그래밍에 대해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서 말이다. 늦은 밤부터 새벽녘까지 게임을 하고 잠깐 잤다가 출근을 하면 온종일 피곤했다. 공은 공대로, 사는 사대로 피곤했다. 모르는 게 죄였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은근히 공과 사가 겹치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같은 팀에서 사내연애를 하는 사람도 있고, 주말마다 등산을 하러 가자는 상사도 있으며, 가족과 같은 회사에 다니는 사람도 있다. 이렇듯 공과 사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일이 사회에서는 비일비재하다.
공과 사의 문제점은 연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좀 더 명확하게 보인다. 예를 들어 여자 친구가 술에 취해 남자 동료의 차를 얻어 타고 집에 왔다면? 반대로 남자 친구가 술 취한 여자 후배를 집에 데려다줬다면? 십중팔구는 사랑싸움으로 이어질 위험한 상황이다. 예전엔 매너로 봐줄 수도 있는 행동이었지만, 영화 〈봄날은 간다〉의 명대사 “라면 먹고 갈래요?” 이후 외간 남자가 여자 집 근처까지 가는 일은 충분히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일이 되었다.
공과 사의 경계선은 도대체 어떻게 그어야 할까? 심판이 있어서 선을 넘으면 반칙이라며 휘슬을 불어 경고를 해주면 좋겠지만 그런 심판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확실하게 공과 사의 선을 긋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선을 긋는 일을 포기하고 공과 사의 경계가 서편 하늘을 노을처럼 그러데이션으로 물들이도록 해서는 절대 안 되겠다. 노을이 지나면 어두운 밤이 오듯 시간이 지나면 당신의 일상도 곧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막막함은 덤이다. 공과 사의 그러데이션이 아니라 콜라보레이션이라면 나름 괜찮을 것 같기도 하다.
어떤 한 선배는 일이 많아도 절대 일을 집으로 가지고 가지 않는다고 한다. 집은 사적인 공간, 쉼의 공간이므로 ‘일은 회사에서 하고 집에서는 쉰다’는 원칙을 고수한다고 한다. 어떤 동료는 회사에서 일이 잘 안 풀리면 집에 가서 맥주 한 캔 하면서 일을 하면 술술 잘 풀린다고 한다. 공과 사의 경계선 역시 사람마다 다르다.
공적인 일 때문에 사적인 일이 피해를 보지 않는 선.
사적인 일 때문에 공적인 일이 피해를 보지 않는 선.
그 피해의 선은 각자의 주관대로 결정해야 한다.
짧은 인생, 여기에 엮이고 저기에 휩쓸려 살지는 말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