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30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가장 먼저 J의 얼굴을 만난다. 하루의 시작과 끝에 가장 많이 마주하는 얼굴이다. 거울을 잘 보지 않는 내 얼굴보다도 자주 보기때문에 가끔은 내 얼굴 보다 그의 얼굴이 더 익숙한 것 같다.
아침마다 까치집이 되어버리는 까맣고 풍성한 곱슬머리, 내가 그의 이목구비에서 가장 부러워하는 단정하고 짙은 눈썹, 장난기 가득한 눈빛이 담긴 아몬드처럼 길고 동그란 눈매, 미간 사이로 우뚝 솟은 콧대와 동그란 콧볼, 미소짓는 듯 올라간 입꼬리에 얇지만 선명한 입술, 턱주변에 거뭇거뭇하게 자란 수염들을 보면 소년 같았던 그가 어느새 아저씨 티가 나는 것 같다.
J와 처음 만난 2016년 5월은 어딜 가도 꽃이 예뻤던 따뜻한 봄이었다. 벌써 6년도 더 훌쩍 지난 일인데, 군대를 전역한지 얼마 안되어 풋풋한 소년같던 J의 얼굴이 가끔 생각난다.
늘 이성과의 만남을 주최하던 대학 동기가 주선한 미팅자리에서 이상하게 J만 눈에 자꾸 들어왔다. 180cm 이하는 안만난다던, 연하는 절대 싫다던 내가. 어째서 그에게 눈이 갔는지 모르겠다. 사람 인연이라는게 정말 따로 있는건가 싶다. 과묵해보이는 형들 사이에서 쉴새없이 떠들고 웃는 J가 조용한 자리에서 분위기를 띄우지 않고는 못참는 나와 너무 닮아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그저 장난기 많은 남자애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속이 깊고 상처도 많은 J와 나는 만날 때마다 대화가 너무 잘 통했다. 우리는 자주 속깊은 대화를 나눴고 금새 서로에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나는 J와 대화할 때 가장 나답다는 생각이 든다. 대화 속에서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는 본인이 관심없는 주제라도 내 얘기에 항상 귀 기울여 들여주고 진심으로 호응해준다.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면 이야깃 거리가 끊이지 않는다. 이렇게 잘 맞는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게 정말 신기할 정도다.
J는 본인이 INFP 라고 하는데 내가 볼 때는 INTP에 가까운 것 같다. 그는 내가 무슨 이유로든 눈물을 흘릴 때 그 마음 저림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공감을 잘하는 F로써 다른 사람의 눈물에 내 눈물샘이 터지곤 한다. 하지만 J는 좀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다. 아주 슬픈 영화를 볼 때도,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심지어 나와 헤어질 뻔 했을 때도 그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아마도 J는 눈물을 흘리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 남모를 아픔도 많았던 그는 평생 흘릴 눈물을 전에 다 흘려버렸을 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가 슬픔에 잠식되지 않는 사람이여서 나는 좋다. 내가 아무 말 못하고 눈물만 펑펑 흘리더라도 그는 내 감정에 동요되지 않고 조용히 안아주니까.
J가 P인건 확실한데, 정말 부지런한 P이다. 나는 완전 계획형 인간인데 조금 게으른 부분이 있고, 그는 계획을 안하는데도 자신의 일은 착착 해내는 편이다. 그는 물리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고서야 절대 지각하는 일이 없다. 4년이 넘도록 직장에서 한 번도 지각하거나 결근한 적이 없다. 같이 살지 않았을 때 데이트약속 중 지각의 9할은 내 몫이었다. 새삼 지각쟁이인 나를 기다리면서도 불평 한 번 하지 않았던 J에게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J도 나보다 못하는 것이 있다. 어렸을 때 부터 혼자있는 시간이 많았던 그는 집안일을 능숙하게 잘 하지 못했다. 아예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집을 어떻게 유지해야 편안한 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옷이 상하지 않게 빨래하는 법, 빨래를 탁탁 털어서 널거나 보관하기 깔끔하게 개는 법, 정리정돈하는 법, 먼지 청소하는 법, 화장실 청소하는 법 이런 것들은 내가 많이 가르쳐주는 편이다.
그런데 J가 나보다 훨씬 잘하는 집안일이 있다. 정말 중요한 요리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내가 요리를 너무 못한다. 요리하기를 싫어하는 것도 있다. J는 해군을 나와서 배에서 요리를 많이 해먹었다고 한다. 덕분에 나는 엄마 대신 내가 하지 못하는 맛있는 음식을 해주는 사람이 생겼다. 그는 요리를 정석대로 하는 편이라 웬만하면 맛이 없는 경우가 없다.
J와 함께 살기 전에는 생활습관이 너무나도 달라서 잘 맞춰가며 살 수 있을까 걱정이 됬는데, 함께하게 되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을 살고있다. 내가 바쁠 땐 J가 잘 못하는 집안일도 하려고 노력하고, 나는 그가 바쁠 때 대신 쉬운 요리라도 하려고 노력한다.
올해초부터 내가 갑작스럽게 개인적인 공부와 창업으로 집안일을 전혀 돌보지 못했는데, J는 나의 성장을 지지해주며 요리, 설거지, 빨래 등 집안일을 도맡아 해줬다. 그 때 생각을 하면 나와 우리 집을 돌봐준 그가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날 것 같다. 물론 지금은 내가 다시 집안일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생기니까 전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나도 언제든 그의 성장을 지지하고싶고 우리는 항상 서로를 위해 살아갈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