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2년, 나이가 들다 20대의 끝자락에 닿은 가까운 어느 날, 늦은 저녁 친구와 대화를 마치고 술집에서 나와 거리를 걸었다. 그날은 평일의 밤으로, 사람들의 걸음이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간 것인지, 주말이었으면 아직까지 소란했을 거리는 한산했다. 곧장 친구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면 됐지만, 좀 더 이 한산한 공기를 느끼고 싶어 홀로 집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나무가 우거진 공원은 몇 주째 미세먼지의 농도가 얕고 산뜻해 큰 숨을 몰아쉬기 좋았고, 자연히 하늘은 선명해 고개를 쉼 없이 위로 올리게 했다. 다져지지 못해 흩어진 구름은 밤색에 물들어 검어져 있고, 흐릿한 구름을 뚫고 달빛이 잔잔히 내려앉던 시간. 나는 홀로 걷던 공원에서 친구와의 대화를 다시금 되짚었다. 대화의 윤곽을 더듬기보단, 대화의 양팔 저울에 무게를 가늠하는 의식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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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를 만나 보내는 시간이 빈번했던 과거를 떠올리면, 지금과 같은 의식은 단 한 번도 행한 적이 없다. 그 시간들을 함께 했던 당시의 친구들은 어땠을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저 만남이 있으면 이야기를 담기보단 비워내는 사람에 더 가까웠다. 제 그릇대로 산다는 세상의 말속에서 그릇은 하나가 아닌 수많은 모양과 색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그 맘 때쯤 알았던 것 같다. 내 안에 있는 여러 그릇 중, 제 안의 이야기와 고민, 괴로움과 같은 결이 고르지 못한 사연들을 담고 참아내는 그릇은 작고 얇았다. 그래서 견디지 못해 위태로울 그릇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를 만날 때면 수시로 뱉어내고, 스스로 '위안'이란 이름의 옻을 그릇에 겹겹이 칠했다.
당시에도 지금처럼 대화를 가늠했다면 분명, 나의 대화의 저울은 한 쪽으로 크게 기울었을 것이다. 대화의 저울 연장선에 관계의 균형이 있다는 것을 모른 채로. 사람이 그런 것인지 아니면 무지한 나만의 문제인지, 나는 오직 나의 그릇밖에 보지 못했다. 상대에게도 분명 존재할 사연을 담는 그릇에 내 이야기만 던진 꼴이었다.
제 그릇을 지키기 위해 상대의 그릇에 고르지 못한 이야기를 던지는 것만큼, 상대를 지치게 하고 관계의 근간을 흔들리게 할 시련이 된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제 이야기로도 벅찬 그릇의 주인이 타인의 이야기까지 양도받는다는 건, 큰 괴로움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지인과의 대화를 마치고 돌아선 뒤에는 한 번씩 대화의 양팔 저울을 들여다보았다. 저울이 혹시 상대에게 기울어져 있지 않은 지를. 그것을 가늠하며 오늘 나는 내 그릇을 지키기 위해 상대의 그릇에 얼마나 많은 말을 던졌는지를.
관계를 형성해 삶에 굴곡을 만들어 희로애락으로 채우는 우리에게, 관계에 예의 갖추는 건 필연이다. 관계의 중심에는 자신만이 아닌 상대도 동등한 지분을 갖고 함께 서야만 저울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내 그릇의 이야기를 상대에게 던질 때, 상대의 이야기 또한 내 그릇 안에 담는 연습을 해야 한다. 이는 내 그릇을 해치는 일이 아니라, 그릇을 단련해 크기를 키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신의 것만으로 속을 채운 순금은 무디고 약해 고결할 수는 있어도 제 힘을 발휘할 수는 없다. 반면, 다른 금속으로 제 안을 채우면 금은 더욱 커지고 단단해진다. 이는 고결함을 잃는 것이 아닌, 금속이란 본질이 강해짐을 의미한다.
삶은 무딘 사람보다 단단한 이가 견딜 수 있는 곳이니, 내 그릇을 비우려 들기보단 던진 만큼 받아내, 그릇을 다져나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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