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잎이 우거진 숲을 등지고 사는 소녀. 소녀는 그런 풍경이 어울렸다. 처연하게 가지를 뻗은 고동색의 나무 위에 핀 선홍빛의 복사꽃을 봄날의 벚꽃보다 좋아했고, 그것이 지고 맺힐 열매를 간절히 기다렸다. 매년 4월이면 그녀는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핀 숲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그런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서늘한 바람이 울창한 숲을 비집고 나를 건드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늘 나를 숲에 세워두었다.
여름의 열기로 달궈진 냇가에서도, 할머니의 손을 잡고 읍내를 나가는 길에 스쳤던 그녀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에도 나는 매번, 그녀에게 이끌려 숲에 도착해 있었다. 폭염 속에서도 늘 그 숲의 바람 냄새가 밀려왔고, 비가 내리는 날에도 매번 그 숲에 포진한 잎으로 비를 피할 수 있었다. 시간이 머뭇대는 그곳에서 다음 날을 기다릴 수 있던 이유는 그녀의 소탈함과 밝음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숲의 향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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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자연스레 그 시절부터 이미, 삶이 우리에게 말한 찬란함과 단조로움 사이에서의 선택지를 고를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닌 흐름에 맡기는 것. 소녀와 같이 하루를 온전히 만끽하는 것으로, 미동조차 없던 시간 속에서 늘 다음 날을 기다리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수 있었고, 새로운 날은 매번 단조롭게 내게 밀려왔으나, 나도 모르게 소녀와 같은 옅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목젖이 보일 만큼 입을 크게 벌려 세상에 소리치는 웃음소리는 내지 못할지 언정, 들숨과 날숨으로 삶을 천천히 마시고 뱉는 행위에서 작은 행복을 느꼈다. 그리고 그날을 회상하는 지금, 곧 이 작고 옅은 행복이 모든 삶에 아니, 적어도 나의 삶의 종착지임을 깨닫는다. 나는 위에서 말한 것과 달리 사실, 삶에게 선택을 제안받은 적이 없었다. 삶의 결이 바다에서 강으로, 위에서 아래로, 강풍에서 미풍으로 흐를 뿐이란 걸 귀띔 받은 것이 전부였다.
태초에 바다에서 태어난 모두와 마찬가지로 바람과 날씨에 의한 기후에 출렁이고 휘몰아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 흐름이 우리가 태어난 바다에 일어나는 현실이므로, 이를 거스를 수는 없기에 자연히 몸을 맡기고 풍파에 맞서며 살아왔다. 그래서 모두와 다름없이 악착같이 바다를 누비며 삶을 엮었다. 거친 실과 총천연색의 진한 실을 서로 엮어 천을 만들어 나갔다.
우리 모두의 천의 그 시작 머리는 하나같이 거칠고 알록달록하다.
하지만, 그렇게 실을 엮기 시작했다 한들 끝머리까지 한결같을 수는 없는 법. 우린 각자의 선택으로 서서히 다른 천을 엮어 나간다. 그리고 나의 천은 조금은 부드러운 실로, 바랬지만 아득한 색감의 실로 천천히 엮어나가는 것을 선택했다. 복사꽃을 보며, 숲을 보며 가만히 바람을 느끼듯 천천히. 눈에 띄는 천은 아니지만 그 잔잔함이 주었던 옅은 미소의 일상은 찬란하고 다채로운 일상보다 더 무겁고 단단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복사꽃이 지고 수개월이 지나 복숭아가 여물었다. 과육을 단단하게 채운 다부진 복숭아부터 여린 과육으로 자신을 지켜달라 말하는 복숭아, 수줍은 색을 띠는 것부터 자신을 과시하는 노을 색을 닮은 복숭아까지. 다채로운 색과 과육을 내세우지만 하나같이 같은 향으로 여름에 스며든다. 소녀가 기다리던 여름이, 소녀가 기다리던 열매가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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