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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성배 Oct 22. 2023

가을은 끝나지 않는 거야

"노을이 꼭 가을 같다. 너도 같은 생각이라면, 가을은 끝나지 않는 거야."

-지난 밤 미애에게 보낸 문자 중에.


변화무쌍한 날씨를 따라 지치지도 않고, 한평생 기분을 갈아 끼우며 사는 이들이 있다. 비가 오면 덩달아 제 마음에도 비가 들이치고, 볕이 들면 덩달아 제 마음에도 볕이 드는 사람. 젖은 땅에서 올라오는 흙내와 볕이 따끈하게 섬유를 데우는 냄새까지 때마다 함께 발하는 이들. 그들 중에는 나도 있고, 미애도 있다. 우리는 날씨를 따라 사는 중이다. 날씨를 따라 사는 우리는 유독 많이 날씨에 좌우되는 나머지 계절에도 지배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봄 가을 겨울에는 썩 좋은 기분으로 살고, 여름에는 매사에 불만투성이다. 그래서 누군가 계절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고 한다면 봄 가을 겨울에 대해서만 말하고 싶다. 미애를 생각하면 비교적 나는 사랑하는 계절이 많으므로, 그가 유독 더 사랑하는 가을을 이야기하는 것도 좋겠다. 때마침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가을이 머물다 가는 시간이 곧 미애가 행복해 할 수 있는 시간이라면, 일 년 중 미애가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은 많이 짧을 것이다. 사계절이 고루 퍼져 뚜렷한 색채를 띠는 게 우리나라의 특징이라 배웠던 시대가 끝났다. 여름에는 동남아를 방불케 할 정도로 변덕스럽게 비가 내리고, 하루가 멀다고 습하고 뜨거운 날이 계속된다. 여름 그 자체의 기간도 과거에 비할 수 없게 크게 늘어, 우리는 이제 일 년의 삼 분의 일은 비, 습기, 더위에 치여 산다. 그 긴 여름이 지나면 조금 나아지려나 싶지만, 곧 눈과 추위에 치여 사는 겨울이다. 중간에 낀 가을은 그저 여름이 겨울이 되려는 준비를 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 찰나. 봄도 다를 바 없다. 아이들은 이제 더 이상 우리나라의 특징으로 명료한 사계절을 배우지 않는다. 미애가 양껏 행복해하기엔 옷을 갈아입는 정도의 시간은 짧기만 하다.


어떤 해의 늦여름. 미애와 한강을 먼발치에서 보며 캔맥주를 마신 적 있다. 밤공기가 제법 시원해 낮은 몰라도 밤에는 긴팔 티셔츠를 입을 수 있던 때였다. 흰색에 속이 비치는 긴팔 티를 입은 미애는 그때 조용히 말했다. 


“생각해 보면 불쌍해. 나름 사계절 중 하나라 불리는 가을이, 그저 옷을 갈아입는 정도의 시간밖에 못 된다는 게. 그래서 내가 가을을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역시 아쉬워. 가을을 좋아하는 이유가 어디 그뿐이냐고.”


미애를 모르는 사람이 얼마 못 사는 게 불쌍해서 가을이 좋다는 미애의 말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잠시 생각했다. 의아함과 이상함, 못된 심보를 본 듯한 표정 그 어딘가의 미묘한 얼굴일 것 같다. 구태여 그들을 설득하고 싶지 않다. 미애도 그럴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그런 작은 사정과 오해를 일일이 들여다볼 만큼 미애의 삶은 넉넉하지 않다. 누가 얼마 살지 못할 거라 말한 것도 아닌데 미애는, 스스로 오래는 못 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도 그의 투병에 대해 나는 깊이 알지 못한다. 얼마나 아픈지, 병은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잘 모른다. 암이라는 것과 이미 한차례 완치를 받았으나 재발했다는 것. 치료가 쉽지 않다는 것 정도가 내가 아는 전부다. 사실 물어보려면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물어본다고 하면 대답하지 않을 리도 없다. 다만 구태여 나까지 그에게 자신의 고통을 상기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미애가 제 입으로 병에 대해 말할 때마다 마치 아픈 사람이라는 사실이 공공연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그게 싫다. 말에는 힘이 있어서, 그 힘이 미애를 더 아프게 하거나 정말로 오래 못 살게 할까 봐 겁이 난다. 그리하여 나는 미애를 아프지 않은 사람처럼 바라본다. 미애가 스스로 아프지 않은 사람처럼 사는 모습에 기꺼이 속아준다.


하지만 사계절 중 미애가 가장 사랑하는 가을이 한없이 짧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스스로 속고 있다는 걸 자꾸만 깨닫는다. 그래서 자꾸만 미애가 조금 더 행복하기를 바란다. 내가 사랑하는 겨울을 무르고 가을이 그만큼 더 머물다 가도 좋으니, 가능한 한 미애가 아주 오래 행복했으면 좋겠다.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지금 저기 노을이 지고 있으니까. 나는 불현듯 저 노을을 보며 생각한다. 계절은 저마다 가진 색이 있다고. 겨울은 흰색, 봄은 분홍색, 여름은 초록색, 가을은 주황색 혹은 붉은색. 계절이 색을 가졌다면 색이 계절을 갖는 일도 이상하지 않다고. 따라서 낙조로 물든 저녁은 그야말로 가을이라 할 법하다. 낙조는 계절에 상관없이 매일 찾아오므로, 가을은 사실 일 년 내내 계절 위에 덧씌워진다. 나는 지금 그렇게 믿고 있다.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다. 미애만 그렇게 생각해 주면 된다. 그런 마음으로 나는 미애에게 이어서 문자를 보냈다.


얼마 살지 못하고 가는 가을을 좋아한다던 네게 꼭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 가을은 사실 계속되고 있다. 저 노을이 증거다. 날이 궂지 않은 이상 저 노을은 계속되고, 노을 따라 가을도 계속된다. 그러니 네가 사랑하는 계절을 따라 너도 계속 행복해라. 끝나지 않는 계절을 따라 너도 계속 살아라.



<이름이 없어도 살아지겠지만>

"설령 같은 이름으로 같은 인생을 산다 해도 역시나 세상은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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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배田性培 : 1991년 여름에 태어났다. 지은 책으로는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너와 나의 야자 시간』 이  있다. 생生이 격동하는 시기에 태어나 그런지 몰라도 땅에 붙어사는 농부와 농산물에 지대한 사랑을 갖고 있다.


aq137ok@naver.com

https://litt.ly/aq137ok :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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