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을은 날아가는 무언가를 잡겠다고 쫓아가는 아이처럼 살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가을을 이미 지난 것처럼 말하는 까닭은 그만큼 짧고 굵어졌기 때문이다. 느지막이 찾아왔다고 늦게 떠나는 것도 아니었다. 떠나는 날은 정해져 있다. 아니 이마저도 예년에 비해 더 짧아졌다. 머무는 시간은 계속 짧아지는데 다녀갔다는 표시는 해야 하니 그 찰나에 기온이며, 색깔이며, 냄새며 바꾸기 바쁘다. 가을은 어느덧 정신없고 부산스러운 사람이 된 것이다. 그래서 나도 그를 따라 숨 가쁘게 살 수밖에 없었다. 올해는 남한산성과 파주에서 가을을 좇았다.
남한산성은 선선하고 약간 붉었다. 완연하게 붉어지기에는 낮과 아침의 기온이 멀지 않았다. 둘이 조금 더 멀어진다면 기어이 가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제 내린 비가 아직 끝나지 않아 그날은 종일 하늘이 흐렸다. 볕이 들지 않은 낮의 공기는 아침처럼 선선했다. 나리는 오늘 입은 코트가 조금 오버스러운 게 아닐까 걱정했지만,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고궁을 거닐며 나는 아주 잠깐 우스운 이야기를 꺼냈다. “강화에서 거닐던 궁과 느낌이 비슷해” 당연한 말에 나리는 코웃음 치며 말했다. 그 시절에 건축법이 얼마나 다르겠냐고. 지금의 집이 거기서 거기이듯, 그때의 궁도 거기서 거기라고. 당연한 말과 당연한 설명에 우린 동시에 웃었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우리는 거기서 거기인 궁이 또 다르게 새롭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강화에서 궁을 거닐 땐 봄이었고, 지금은 가을이니 계절이 바뀐 덕분일까? 아니다. 설령 계절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아직 가을 옷을 제대로 입지 않은 그때, 하늘도 흐리던 그때가 강화에서 보았던 봄의 궁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었다. 그곳의 봄은 당장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 흐드러졌다.
우리는 도통 알 수 없는 이유를 뒤로 한 채, 결국 이곳만의 아름다움에 설득당할 뿐이었다.
파주의 마장호수를 찾았을 땐 남한산성 때보다 가을이 더 짙어져 있었다. 초록은 찾기 힘들고, 핏빛이 역력했다. 호수의 가장자리를 두르며 나 있는 길을 걸으며, 우리는 문득 한 바퀴를 온전히 돌아보기로 마음먹는다. 생각보다 호수의 크기가 만만해 보였기 때문이다. 동네에서 자주 걷던 호수 공원처럼.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랬다. 그래서 볕은 걸림돌 하나 없다고 강하게도 내리쬐었다. 제법 바람이 차가운 날이었지만, 볕이 식기도 전에 땅에 닿으니 쓸모가 없었다. 그늘이 없는 곳에서 볕은 여름의 어느 날처럼 따가웠다. 여름보다 오히려 가을에 살이 더 많이 탄다는 말을 여실히 실감하는 시간이었다. 볕이 들 때는 빠르게 걷다가 그늘이 진 곳에서는 천천히 걷다 보니 시간 반이 넘게 지나서야 한 바퀴를 다 돌 수 있었다. 그사이 우리는 윤슬도 보고, 단풍도 보고, 작은 폭포 위에 핀 무지개도 보았다.
“참 예쁘다. 사실 새로울 것도 없는데. 동네 호수 공원이랑 비교하면 별로 다를 게 없는데, 그래도 참 예뻐. 새삼스럽지?” 나리가 말했다.
나는 그 말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다를 게 없어도, 새롭지 않아도 예쁘다는 것. 그건 마치 삶이 아무리 뻔해도 자신은 기어코 아름다운 것을 찾을 수 있다는 자만처럼 보였다. 무해하고 다정한 ‘자만’ 같은 것.
살아가며 우리는 얼마나 더 새로운 것들을 볼 수 있을까. 나의 경우엔 그게 무엇이든 간에 지금껏 살아온 삼십사 년의 삶에서 한 번쯤은 보았을 장면일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비슷한 공간에서 먹고살며 나이를 먹어갈 테니까. 지난 온 삶도 지나갈 삶도 어느 천장과 어느 바닥 사이 약간 좁은 공간에서, 위에도 아래에도 닿지 않게 조심조심 나아가며 살아갈 것이다. 반면 나리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다. 늘 새로운 경험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그 모든 새로움을 켜켜이 쌓아서, 그 기억으로 오늘의 고단함을 견디는 사람이기에. 나리가 나처럼 산다면 그 고달픈 삶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리는 이 뻔한 삶으로 와 매번 아름다운 걸 찾아내겠다고 한다. 남한산성과 마장호수에서 찾았듯이. 이 두 곳은 역시나 내가 가고 싶은 곳이었다.
리드미컬하고 자유분방한 여자가 뻔하고 지루한 남자를 만났다니 이런 비극도 없다. 그러나 이기적인 줄 모르는 남자는 비극인 줄도 모른 채, 언제가 한 번쯤 보았을 장소와 먹었을 음식을 또 여자에게 말한다. 그럼 여자는 또다시 거기서 거기인 것들을 예쁘고, 맛있다고 말한다.
남자는 깨달아야 한다. 어떤 연인이든 부부든 시간이 지나면 결국 같은 것을 반복하며 살아가겠지만, 이 여자는 그때가 되어서도 나와 함께라면 모든 게 새삼스럽다고 말할 것이라는 걸. 그건 남자의 생애 다시 없을 요행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