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쓰기 모임에서 시작해 소설가가 되기까지
▲ 소설 쓰기 글쓰기 ⓒ 픽사베이
현재의 삶이 아니라 꿈꾸고 원하는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
그것은 적어도 소설 안에서는 가능하다. 마치 배우가 자신의 인생과 다른 삶을 경험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 나는 거대하고 장대한 스케일의 장편소설을 쓰고 있다.
이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영화로 만들어지고 드라마로 제작될 수도 있다. 해리 포터나 반지의 제왕을 능가하는 긴장감과 매력이 넘치는 작품이 탄생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상상은 아직 '가능성'에 머물고 있고, 미래형이다. 그 미래를 위해 지금 나는 노트북 앞에 앉아 눈을 껌뻑거리며 장편소설을 쓰고 있다.
소설 쓰기를 시작하게 계기는 단순했다. 언제부터인가 삶이 권태롭고 허무하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것 같고 내가 원하지 않는 강요된 선택으로 삶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흘러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능하다면 다시 시간을 과거로 돌려서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대한 후회와 공허감이 커질수록 마음은 더 피폐해지고 우울해졌다. 울적한 마음을 벗어나기 위해 지칠 때까지 달려 보기도 하고 술에 취해 보기도 했지만 답답한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원망과 울화가 가슴에서 치밀어 올랐다. 평소에 즐겨 읽던 책도 손에 잡히지 않고 모든 일이 귀찮아졌다. 그렇게 몇 개월간 마음에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심드렁하게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 관심을 끄는 모임을 발견했다. 소설 쓰기 모임에서 함께 소설을 창작할 예비 작가를 모집하는 글이었다.
'요새 누가 소설을 읽는다고 소설을 쓰지?'
'소설로 밥 굶지 않고 살 수 있나?'
'저건 글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지?'
'소설은 아무나 쓰나?'
마음속에서 바로 부정적인 생각들이 올라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부정적 생각에 맞서 봐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덜컥 소설 쓰기 모임 참가 신청을 했다.
내심 첫날 가서 적응 못 하면 바로 그만두어야겠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그러나 막상 모임이 되니 소설을 한 번도 써 보지 않은 내가 과연 글을 쓸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내가 소설을 쓴다고 해도 수준 낮은 글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것도 창피했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을 다잡고 첫 번째 모임에 나갔다. 소설 쓰기 모임은 기성 소설가와 등단을 준비하는 예비 작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행히 몇 주 동안은 소설 쓰기 이론을 배우는 시간이라 부담이 없었다.
예비작가들은 나이와 직업 성별이 다양했다. 20대 대학원생, 30대 직장인, 40대 가정주부, 50대 자영업자, 60대 은퇴자 등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하지만 나를 빼고 모두 글쓰기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소설 이론 수업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한 명씩 단편 소설을 써 와서 함께 읽고 평가와 조언을 하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예비작가들의 개성은 소설 내용과 문체에서 드러났다. 작품이 신선하기도 하고 도전적이기도 하고 웃기기도 한 습작들이었다. 나는 모임에서 소설을 평가하지 않고 읽는 것을 즐겼다.
그러다 어느덧 내가 작품을 발표할 차례가 다가왔다. 나는 소설을 쓰기 위해 퇴근 후에 도서관에 가서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펼쳤다. 분명히 참신한 소재는 많은데 막상 글을 쓰려면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소재를 떠올리는 것과 소설을 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매력 있는 소재라고 생각하고 소설을 쓰다 보면 중간에 더 이상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거나 주제를 알 수 없는 모호한 글이 되었다.
주인공은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갈 것이다
▲ 소설 쓰기 글쓰기 ⓒ 정무훈
글을 썼다 지웠다 반복하며 며칠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냈다. 다시 한번 글쓰기 모임 참석에 위기가 왔다. 다음날까지 단편 소설을 쓰지 못하면 모임에 참석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시간에 쫓겨서 겨우 A4 10장 분량의 첫 단편 소설을 완성했다.
내용 구성이 어설프고 내용도 뒤죽박죽 섞여 있는 첫 소설은 평가 모임에서 사람들에게 큰 웃음을 주는 작품으로 남았다. 다른 사람에게 어설픈 작품을 보여준다는 것이 창피하기도 했지만 단편소설 한 편을 완성하니 특별한 일을 이룬 것처럼 답답했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소설 쓰기의 매력은 모든 세계를 작가가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소설 속 주인공의 운명은 작가의 손에서 결정된다. 하지만 소설을 쓰다 보면 내가 창조한 주인공도 결국 주어진 환경과 제약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선택의 자유는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결정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니라 주어진 한계 안에서 가장 나다운 선택, 내가 현명한 선택을 하는 것이다.
소설을 쓰면 소설 속 악역에게도 연민을 느끼게 된다. 그 이유는 그 인물이 살아온 과정을 알게 되기 때문에 나쁜 행동을 비난만 할 수 없다. 어쩌면 나의 삶도 자책하거나 자기를 비하하는 것보다 내 삶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한지 모른다. 살아오면서 자주 실수를 했지만 그 순간에는 나름 최선의 선택을 하며 여기까지 살아왔기 때문이다.
소설 쓰기 모임에 참석하는 동안 4편의 단편소설을 완성했다. 그 작품들을 혹시나 하는 기대로 공모전에 출품했지만 예심도 통과하지 못했다. 소설가 선생님은 나에게 습작을 많이 써 봐야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고 격려해 주셨다. 나의 습작은 건축의 기초공사와 같은 것이다. 기초가 탄탄하면 어떤 건물을 지어도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나의 작품도 좋아질 것이라 믿는다.
소설을 쓰기 전에는 걱정하거나 우울하거나 불안해하는 시간이 많았다. 소설을 쓰면서는 상상이나 공상을 즐기는 시간이 늘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소설 내용을 구상해 보고 주인공의 생각과 행동을 상상해 본다. 나의 현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고 오히려 더 나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소설을 구상하는 시간 동안 나는 또 다른 인생을 살 수 있게 된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나는 올해 처음으로 장편 소설 쓰기를 시작했다. 올해 목표는 첫 장편소설을 완성하는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을 통해 내가 살고 싶었던 인생과 살지 못했던 인생과 살 수밖에 없던 인생을 담아 보려 한다. 소설 속의 주인공도 지금의 나처럼 때로는 좌절하고 인생의 방향을 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어떠한 인생이든 주인공은 자신의 삶을 이야기를 만들어갈 것이다.
소설은 어제 쓴 마지막 문장이 끝이 아니라 오늘 쓴 첫 문장이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