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에서는 행복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자꾸 떠올랐다.
▲ 개선문에서 바라 본 파리 전경. 유럽 여행 사진 ⓒ 정무훈
가을이 깊어가는 시간, 올해 마지막 팥빙수를 먹는다. 마지막 팥빙수에 여름도 떠나보낸다. 2015년 7월 매미소리를 뒤로 하고 대한민국 서울을 떠났다. 한달 동안 따가운 유럽의 햇살에 숨이 막힐 때 떠오르는 것은 입안이 얼얼한 팥빙수였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 나라를 떠나고 싶었다. '이 나라에서는 행복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자꾸 떠올랐다. 2015년 7월 소나기가 쏟아지는 어느 날 나는 대한민국을 떠났다. 유럽 여행의 유일한 목적은 이 나라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가능한 멀리 이 나라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통장 잔고를 모두 털어 영국행 비행기 표를 샀다. 비행기는 15시간 뒤 지구 반대편에 하루를 거슬러 나를 내려놓았다.
한 달이라는 시간동안 나는 유럽의 난민이 되어 거리를 떠돌았다. 낯선 골목에서 길을 잃고 나의 언어가 아무 소용이 없어도 오히려 이방인이 되어 낯선 도시에 있는 것만으로 묘한 안도감이 생겼다.
익숙하지 않는 곳에 있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이방인들이 되었을 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 런던 풍경. 유럽 여행 사진 ⓒ 정무훈
런던에서 빅벤을 보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갔을 때의 일이다. 빅벤이 보이는 템즈강 다리 위에 사람들이 혼잡하게 오고 가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있어 호기심을 가지고 관찰했다. 야바위꾼이 바닥에 3개의 그릇을 놓고 한 개의 주사위를 꺼내 놓았다. 그 남자는 능숙하게 주사위의 위치를 옮긴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사람들이 주위에 몰려들고 그 중에 한 사람이 판돈을 걸었다. 그리고 운이 좋게 돈을 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점점 야바위꾼들이 늘어나고 여기저기에서 더 많은 도박판이 펼친다. 구경꾼들과 야바위를 하는 사람들도 점점 더 많아진다.
나는 다리 난간에 기대어 자리를 펼치는 야바위꾼들은 관찰했다. 가만히 보니 처음에 돈을 거는 사람은 야바위를 하는 사람과 한 편이었다. 구경꾼들들 앞에서 돈을 걸고 돈을 따는 모습을 보여주며 현혹을 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욕심이 생겨 자연스럽게 돈을 거는 사람이 생기는 것이다. 실제로 돈을 따 가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것은 야바위꾼의 눈속임 기술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정치, 경제, 교육도 야바위와 다르지 않다. 성공하거나 신분 상승의 신화 속에 계속 사람들은 도박판에 돈을 건다. 하지만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들은 서서히 모든 것을 잃어간다.
잠시 스쳐간 시간이었지만 런던은 서울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파리도 마찬가지였고 유럽의 대도시의 풍경은 모두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도시의 우울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지하철에서 마주친 얼굴들, 가판에서 마주친 얼굴들, 간이식당에서 바라본 얼굴들은 모두 일상과 노동에 지쳐서 굳은 표정이었다. 그 얼굴에 그들의 삶이 담겨 있었다. 나는 대한민국에는 이미 사라져 버린 표정 바로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잠시라도 그들처럼 웃고 떠들고 춤추고 노래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방인에게 그런 시간은 찾아오지 않았다. 유럽 슈퍼에서 가장 싼 샌드위치를 사는 것과 우리나라 편의점에서 삼각 김밥을 사는 것이 다르지 않았다.
▲ 스위스 그린델발트. 유럽여행 사진 ⓒ 정무훈
나는 유럽의 도시들을 거치면서 계속 실망했다. 내가 찾던 여유로운 표정은 뜻밖에 스위스 산골 마을에 있었다. 스위스에서 나는 그린델발트 어느 농가에 우연히 묵게 되었다. 주인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인자하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나를 맞아 주었다. 스위스에 머물면서 내가 한 일은 아침에 상쾌한 공기를 마시고 산을 오르고 풀밭을 거닐고 어슬렁거리며 작은 마을을 걸은 것뿐이었다.
그것만으로 나는 아침마다 행복했고 점심때가 되면 활력이 넘쳤고 저녁때가 되면 평온했다. 깊이 잠들 수 있었고 아침이면 가뿐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버스도 없는 길을 더 많이 걷고 더 적게 먹었지만 점점 행복했다. 일상의 여유로움이 무엇인가 생각해본다. 농가의 할아버지는 매일 아침 집 앞에 나와 앉아서 아이거 빙벽을 바라보신다. 담배 파이프를 물고 산을 바라보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신다. 멈춰진 시간, 전혀 새로울 것 없는 하루, 그런데 이미 충만한 하루, 자연이 주는 풍요로운 선물이 그곳에 있었다.
▲ 이탈리아 베네치아 유럽 여행 사진 ⓒ 정무훈
대한민국에서는 사회에 대한 죄책감과 부채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내가 누군가에게 아무 잘못을 하지 않아도 미안해지고 가슴 아픈 나라, 끼니 걱정 없고, 입시 걱정 없고, 일자리 걱정 없고 노후 걱정 없는 것이 이상한 나라, 남을 돕기는커녕 나하나 살기도 어렵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돈을 버는 것이 불가능한 나라, 경쟁하지 않고 패배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사는 것이 불가능한 나라, 불행을 향해 질주하며 누가 더 불행한가를 경쟁하는 나라.
글을 쓰는 동안 팥빙수의 얼음이 서서히 녹고 있다. 시간이 흘러 가고 있다. 이 팥빙수를 먹기 위해 다시 내년 여름을 기다려야 한다. 내년에는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한 달 동안 유럽을 떠돌면서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대한민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여행의 마지막 날 스페인의 한 골목에서 메모지를 꺼내 작은 결심을 적었다.
여행 같은 삶을 살자. 대한민국에서 돌아가서 여행자로 사는 것이다.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떠날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면 덜 힘들지 않을까?
그래서 여행자의 규칙을 만들어 보았다.
▲ 프랑스 아를. 유럽여행 사진 ⓒ 정무훈
여행자의 규칙
여행자의 규칙 1. 물건에 대한 집착과 욕심을 줄이기
여행에서 꼭 필요한 물건은 작은 여행 가방 하나로 충분하다. 새로운 물건은 그만 사고 있는 물건도 말끔하게 줄이고 정리하자. 물건을 비우고 공간을 비우고 마음도 비우자.
여행자의 규칙 2. 느리게 살기
그동안 조급한 마음 때문에 지나친 일상의 순간들을 떠올린다. 생각도, 말도, 밥도, 판단도, 화도 천천히 내자. 미소도 천천히 짓고 음식도 천천히 하자. 걸음도 천천히 걷자. 일도 천천히 하고 책도 천천히 읽자.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천천히 듣자.
여행자의 규칙3. 더 많은 여유를 만들기
일하는 시간뿐만 아니라 일을 생각하는 시간도 줄이자. 필요하지 않은 일을 더 만들지 말고 최소한으로 줄이자. TV와 컴퓨터와 광고에 시간을 뺏기지 말자. 좋아하는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하는 시간을 늘리자.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자주 연락하고 힘들게 사는 이야기를 나누며 웃자.
여행자의 규칙4. 좋아하는 일을 하기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가까운 공원을 산책을 하고 틈틈이 명상을 하고 집 안에 화분을 돌보고, 땀 흘리는 운동을 하고 자유롭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자.
여행자의 규칙5. 떠나야 할 때를 알기
현실에 안주하고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꿈꾸는 삶을 위해 기꺼이 가졌던 것들을 내려놓을 준비를 하자. 가지 않은 길을 향해 두려움을 품고 걸어가는 것이 여행의 시작이다. 떠나야 할 때는 가장 편하다고 느끼는 순간이다.
여행자의 규칙6. 함께 길을 걷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함께 삶을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공감하고 보듬는 마음을 갖는다. 상상하고 토론하고 변화를 위해 행동하자.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동행자이다.
▲ 스페인 바르셀로나. 유럽여행 ⓒ 정무훈
* 2015년 7월과 8월 한 달 동안 유럽(영국,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스페인)을 난민으로 떠돌며 그 나라 사람들의 표정만 쳐다보고 돌아옴. 여행에서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환하게 웃어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