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에 명동을 다녀왔다, 가방을 사기 위해서.
오늘은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월급날이다.
저번주부터 오늘만을 기다렸다.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웠다. 오전 근무 하고, 점심시간 되자마자 롯데 본점으로 가야지. 나는 몇백만 원짜리 가방을 살 거다. 소위 말하는 ‘명품’ 가방이다.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하루 8시간, 도어투도어 11시간, 그리고 야근까지. 내 한 달의 가치와 화폐가 교환되는 날. 오늘은 월급날.
추운 봄날이었지만 춥지 않았다. 사람들이 툭툭 쳐도 괜찮았다. 짜증도 화도 나지 않았다. 여유란 게 이렇게 무섭다. 3시간 후면 통장에 월급이 꽂힌다고 생각하니 뭐든 괜찮았다. 내 연봉은 절대적으로 높지 않다. 다만, 0원이었던 휴직기간을 생각하니 그에 비해서 다행이었다. 휴직기간이 그 비교군이었다. 그래서 괜찮았다. 0원보단 많으니까.
몇백만 원짜리 가방을 사는데 아무거나 살 수는 없다. 두 딸을 키우는 어머니만큼 아이들을 생각했다. 나는 합리적인 소비를 할 거다. 아이들에게 물려줄 가방을 살 거다. 내가 다 쓰고 아이들에게 물려줄 생각까지 하다니, 전철에 탄 순간부터 가방을 들고 다닐 나를 떠올렸다. 스스로를 돌아볼 생각 따위 하지 않았다. 난 오늘 무조건 가서 카드를 긁을 것이다. 시원하게.
모델은 이미 정해놨다. 이미 수많은 유튜버가 가방의 쓸모를 증명해 줬다. ‘명품 잘 산 템’, ‘절대 안 질리는 명품백’, ‘2025 뜨는 가방’ 등등 소비를 조장하는 유튜브는 차고 넘쳤다. 이미 나의 시냅스는 가방에 정렴 당했다. 나의 도파민은 가방 유튜브를 찾아보는 일이었다. 일이 잘 안 풀릴 때마다, 애들이 야밤에 울 때마다 벌건 눈으로 유튜브를 보았다. 콘텐츠는 충분했다. 나의 결정만이 남았을 뿐. 결국 검정, 베이지 2개의 모델로 선택지를 좁혔다. 이 정도면 됐다.
눈을 감으니 가방을 멘 내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나는 명품 로고가 박히지는 않았지만 디자인은 명품인 그런 제품을 살 예정이다. 그리고 그 가방을 착용하고 지하철을 탈 것이다. 사람들에게 치여가며 환승을 할 것이고, 가방을 메고 출퇴근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 가방은 나를 빛나게 해 줄 것이다. 그래서 명품이어야 한다. 나는 명품 가방을 살 것이다.
침을 꿀꺽 삼켰다.
점심시간 5분 전, 내 심장은 미친 듯이 펌프질을 하기 시작했다. 가자, 백화점으로.
점심시간은 길지 않기에 종종걸음으로 명동을 갔다. 뛸 수도 있었지만, 얼굴이 빨개지는 건 원치 않았다. 삶의 고단함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뛰다 걷다 뛰다 걷다를 반복하며 숨을 골랐다. 흔적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 내 삶의 치열함을.
여유롭게 보이는 게 나의 목표다. 비록 내 삶은 푹 찌든 서울역 워킹맘일지라도.
제시간에 도착했다, 운이 좋다. 이제 숨을 고르고 줄을 서면 된다. 줄을 서야 한다니 역시 애태우는 것만큼 좋은 마케팅이 없지. 암요 암요 마케팅에 넘어가 드려야지. 하지만 생각보다 줄은 빨리 빠지지 않았고 긴 기다림 끝에 매장에 입장할 수 있었다.
“찾는 모델 있으신가요?”
순간 고민했다. 마음 같아서는 핸드폰으로 닳고 닳게 봤던 모델들을 직접 착용하고 하나하나 보여달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월급쟁이인 나는 1시까지 서울역으로 복귀해야 했다. 이미 줄을 서느라 시간을 많이 허비했다.
“저거, 저거 주세요.”
손가락을 모델을 가리켰다.
드디어 꿈에서 계속 보던 가방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침을 꼴깍 삼켰다. 화면보다 더 예뻤다. 옆에 서 있던 검정정장을 입은 흰 장갑을 낀 판매원이 박수를 쳐줬다.
“고객님, 너무 잘 어울리세요”
그리고 거울을 봤는데…….
얼굴이 벌게진 내가 있었다. 표정은 숨길 수 없었다. 한껏 올라간 광대, 빠르고 얕은 들숨과 날숨. 누가 봐도 뛰어 온 사람의 몰골이었다. 게다가 상기된 얼굴까지.
단정하게 메이크업을 하고, 뽕머리까지 한 판매원 앞에서 나의 모든 것을 드러내고 싶지가 않아 졌다. 그래도 나는 고객이다.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키자.
그 자존심이란 게,
나의 모든 것을 보여주지 말자는 거였다.
“아, 가방 참 예쁘네요…”
안경이 빛에 반사됐다. 아… 나가 나 스스로의 모습을 잘 알았다. 그리고 그 모습이 너무 잘 보였다. 빚이 나는 건 내가 아니라 가방이었고, 매장이었다. 하, 왜 하필 블랙원피스를 입은 걸까. 수수하기 이를 데 없다. 백화점의 강한 조명은 나를 보이게 했고 나의 현실을 보여주게 했다. 가방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어두워졌다. 다행이다 그래도 내가 나로 보여서
하지만 처음 마음먹었던 대로 나는 이 가방을 사야 했다. 그래야 나의 한 달이 보상받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가방은 내 월급을 훌쩍 넘는다. 그리고 다음 달의 나까지 이 가방을 위해 일해야 했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시간의 가치가 이 가방 하나보다 못하다는 사실, 이 가방이 온전히 내 것이 되려면 한 달 반의 내가 일해야 한다는 사실. 무엇보다 나를 충격에 빠트린 것은 좌로보다 우로보나 ‘서울역으로 출근하는 회사원 1‘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
이 모든 사실이 나를 당황케 했다.
“이걸로 할게요”
하지만 입은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이걸 꼭 살 것이다. 반색하는 판매원의 얼굴이 보였다. 거울 한 번 보고 바로 산 거다. 특별한 멘트도 필요 없었다. 잘 어울린다는 말 한마디에 바로 사겠다는 고객이 생긴 것이다.
계산대 앞으로 갔다. 카드를 꺼냈다. 회사 복지카드다. 갑자기 회사 이름이 나를 뚜드려 패는 듯했다. 카드 앞에 새겨진 회사 이름이 유난히 나를 비웃는 듯하다. ‘너 스스로도 알고 있지?’ 카드가 나를 향해 외치고 있었다.
순간 ‘이건 아니다, 정말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죄송해요. 다음에 다시 올게요 “
밖을 나오니 12시 50분. 남은 점심시간은 10분. 나는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눈썹이 휘날리도록.
결국 월급날엔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내 시간의 가치가 이 정도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기 때문이다. 대신 2,000원짜리 커피를 한 잔 사 마셨다. 마음이 편했다. 내 수준의 소비를 했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옆자리 워킹맘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선생님, 우리 다음 주에 남대문 가서 애기 옷 살래요?’
서울역 워킹맘의 한 달은 즐거웠다. 비록 실물을 갖진 못했지만 상상 속에서 명품백을 마음껏 매 보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