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를 교체하는데 기사님이 대뜸 한 마디 하셨다.
세탁기가 고장 났다.
오래 쓴 세탁기이긴 했다. 대학생 때부터 쓰던걸 신혼집에 가져왔고 이사를 몇 번 했더라… 거의 15년 정도 쓰다가 결국 운명을 달리한 거다. 이 정도면 호상이다. 세탁기를 바꿔야 할 때가 된 거다.
세탁기가 집으로 들어오는 순간 아이들은 오오오! 하고 신기해했다. 뭐든 보여주고 싶은 게 어미의 마음이다. 곁에서 추임새를 넣으며 세탁기 설치 과정을 지켜봤다.
낡은 세탁기가 빠져나가고 남은 곳엔 찌꺼기가 가득했다. 재빨리 청소를 하니 새하얀 세탁기가 들어왔다. 겨우 1년 살았는데 이토록 세월의 흔적은 정직하기만 하다.
추운 날씨였는데도 불구, 땀을 뻘뻘 흘리는 기사님을 보니 마음이 안 좋았다. 먹고사는 건 누구에게나 고된 거다. 다만 나는 서울역으로 출근하고, 이 분은 출장을 다니는 차이가 있을 뿐.
“물 한 잔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커피라도 한 잔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힐끗 보는 데 세탁기에서 물이 콸콸 나오자 기사님의 양말이 젖기 시작했다.
“새 양말 한 켤레 드릴까요?”
“오, 감사합니다”
설치가 끝났다. 기사님은 양말을 갈아 신으시며 내게 물었다.
“혹시 세탁기 건조기 불편한 점 있으셨나요? 한 번 봐드릴게요”
이때다 싶어 이것저것 궁금했던 점을 여쭈었다. 친철히 대답해 주신 기사님. 뭔가 마음이 흡족하였다. 저분도 가장이고,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누군가의 남편일 것이다. 하루 종일 젖은 양말을 신고 일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가족들의 마음이 안 좋을 것이다. 속상할 것이다.
작업을 마치고서 한 마디 하셨다.
“혹시 연년생인가요?”
“오, 어떻게 아셨어요? 네, 연년생이에요.”
“혹시 일하시나요?”
“네, 복직한 지 얼마 안 됐어요 “
“절대 그만두지 마세요”
“네? 저 그만두면 안 돼요? 힘들어 죽겠어요”
“애들은 커요. 육아의 고통보다, 돈 없는 고통이 더 크더라고요. 그건 해결이 안 돼요”
“아…“
“절대 그만두지 마세요”
사실 그만둘 생각을 안 하고 있긴 하다. 벌써부터 퇴사 생각을 하면 걷잡을 수 없을까 봐. 하지만 문득문득 휴직 기간이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다. 복직 3개월 차, 애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어린이집에서 전화가 왔다.
둘째는 3월부터 어린이집에 들어갔는데, 적응하는 게 쉽지 않나보다.
“어머니, ㅇㅇ가 너무 울어요. 혹시 데리러 오실 수 있으신가요?”
하지만 갈 수 없었다. 나는 회의 중이었다. 참석을 안 하고 서면으로 회의자료를 받을 수 있었지만 나는 초짜이고, 아직 복직한 지 얼마 안 되었고, 직접 회의에 참석해도 그 맥락을 못 잡는데, 회의에 참석을 안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였다.
아침 7시에 집에서 나설 때마다 아이들은 운다. 처음에는 모르고 잠들어 있다가 이젠 깨서 나를 바라보고 운다.
“엄마, 회사 가지 마! 회사 가지 마, 엉엉엉”
둘째는 다리에 매달려 울고, 첫째는 이불속에서 운다. 잠에 취한 채.
이런 상황에서 나는 회사를 다니고 있다. 회사에선 나를 배려해 준다. 일은 줄어들지 않았지만, 단축근무도 하고 육아휴직도 했었다. 일은 줄어들지 않았지만.
해결책은 없다. 아이들에게 적응하라고 하는 수밖에 없다. 회사를 움직일 순 없으니 움직일 수 있는 대상인 아이들이 그 모든 것을 감내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쩔 수 없지’, ‘너희들은 곧 크잖아’, ‘나중엔 돈 버는 엄마를 더 좋아한다더라’ 등이 그 핑곗거리다.
하지만 3살, 1살인 우리 아이들에게 엄마의 빈자리는 참을 수 없는 힘듦일 것이다. 그래서 새벽에도 울고 아침에도 울고 자다가도 나를 만지며 잠드는 거겠지.
첫째는 늘 내게 안겨있다.
오늘 갑자기 안겨있던 첫째가 내게 말을 했다.
“엄마, 안아줘. 보고 싶어.”
“엄마가 안아주고 있잖아. 그래도 보고 싶어?”
“응, 나는 하루 종일 엄마가 보고 싶어. 엄마 생각나”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아이들에게 이런 고통을 안겨주면서까지 다녀야 하는 건가? 안겨 있어도 보고 싶은 엄마라니, 내 존재가 얼마나 크길래 이런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걸까.
돈 없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는 모르겠다. 다만, 아이들이 잘 크기만을 기도할 뿐이다.
오늘도 새벽부터 애들을 달랬다. 이 시기는 금방 지나갈 거라고, 너희와 있는 시간보다 돈 없는 고통이 더 크다고들 한다고. 너희와 있는 시간과 돈을 맞바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