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기다렸다. 25일, 전단지를 받고 빵을 샀다.
서울역은 재미있는 곳이다.
빠르게 발걸음을 재촉하는 회사원이 많은 곳이기도 하고,
외국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길을 묻는 곳이기도 하며,
전단지를 뿌리는 노인들이 계시는 곳이기도 하고,
앞서가는 회사 선후배를 보며 한쪽 눈을 질끈 감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막 상경했을 때, 빌딩숲을 보며 사원증을 목에 걸고 다니는 내 모습을 상상했던 곳.
이런 내가 숭례문을 바라보며 근무를 하고 있다. 그토록 원하던 직무에서.
하지만 세상엔 꼼수가 통하지 않는다. 돈을 버는 행위는 어디나 만만치 않고 엄청난 스트레스를 요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토요일마다 회사 관련 글을 쓰게 된 건, 그나마 기분이 좋을 때 유쾌한 글을 올리고 싶어서 일 정도니 말이다.
복직 후 나는 엄청난 월요병에 시달리고 있다.
일요일 오전부터 우울해지는 게 그 병의 증상이다.
가장 힘든 건 역시 일이다. 지난주에는 일이 너무 어려워 답이 보이지 않아, 빈 회의실에 혼자 앉아 눈물을 흘렸다. 하루 종일 매달려도 진척은 더디기만 했다. 내가 아직 초짜라서 그렇다.
시간은 흐르는데 속도는 나지 않고, 앞길은 보이지 않는다. 한숨 쉬는 것조차 눈치가 보여 조용히 회의실로 가 앉았다. 그래도 남들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순 없었다. 얼른 눈물을 닦고 다시 모니터 앞에 앉았다. 그저 월급날만을 기다리며…
육아휴직 3년 동안 두 아이를 얻고, 누구보다 열심히 육아에 임했지만 이런 경험은 회사에 전혀 필요가 없다. 나는 그저 감 떨어진 애엄마일 뿐이다. 함께 입사한 동기들은 이미 정상을 향해 내달리고 있다. 그들은 뭐든 수월하게 척척 해나가는 듯 보인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다르다고 해도, 맘 속 꿈틀거림은 어쩔 수가 없다. 부글부글. 왜 내 눈에만 안 보이는 걸까, 언제쯤 나는 원활하게 업무를 진행할 수 있을까.
열심히 회의 준비를 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나는 동일 주제로 피드백을 적극 반영하여 2주 후에 또 회의를 주최해야 한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하 생략)
우리 회사 월급날은 25일이다.
월급날에 둔감했던 과거의 나는 없다. 내 마음속의 달력은 이미 25일을 기점으로 모든 날이 설계되어 있다. 25일만이 존재한다. 25일 외의 날은 의미가 없다.
단순한 검은색 동그라미가 아닌, 새빨간 립스틱 색깔로 25일을 위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리고 또 그렸다. 25는 나를 지탱하는 숫자가 되어버렸다.
이윽고 25일이 되었다. 띠리링 입금이 완료됐다는 알림이 울렸다. 급히 나는 화장실로 향했다. 나의 시간과 정성, 스트레스는 얼마일까? 조심스럽게 어플을 켰다. 휴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머릿속에서 재빠르게 계산을 해봤다.
‘나는 시급 ㅇㅇ짜리 인간이구나.’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도전이고, 배움이고, 자기 발전이고 뭐고 월급이 말해주고 있다. 네 시간의 가치는 얼마라고.
육아휴직 후 제대로 받은 첫 월급.
여느 날처럼 공짜 야근을 하고 퇴근길을 나섰다.
추운 겨울날 전단지를 돌리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전단지를 받았다. 한 장 더 달라고 했다. 두 장을 받았다. 할머니는 한참 어린 나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어휴~ 고마워요. 날이 너무 춥네"
돈을 버는 행위는 누구에게나 모두 혹독한 것. 괜스레 마음 한구석이 찡해진다. 보지도 않은 전단지를 힐끗 바라본다. 어쩔 수 없으니 이런 광고방법을 선택하는 것이고, 어쩔 수 없으니, 추운 겨울날 수많은 사람들의 거절을 감내하고 전단지를 뿌리는 것일 테다. 먹고살아야 하니까.
지하철을 타고 환승역에 내렸다. 평소 지나가기만 했던 역사 내 상점 앞에서 괜스레 어슬렁 거렸다. 오늘은 무엇이든 살 거다. 이 상점에서.
상가의 주인은 처음엔 먹을 것만 팔다가, 이젠 팔토시도 팔고, 마스크도 판다. 상점 앞엔 천 원짜리 빵이 즐비하다. 언제나 8시에 상점 문을 열지만 손님이 계산하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지나갈 때마다 다짐하곤 했다. '이번 달 월급 받으면 꼭 저기 물건을 갈아줘야지.'
'갈아주고' 싶었다. 유난히 힘든 날, 출근하기 싫은 날 저 상점을 보며 다짐했다. 꼭 저 상점의 손님이 되고 싶다고. 몇 번째 손님일지 모를 역사 내 작은 상점의 손님이 될 거라고.
바스락 거리는 천 원짜리 빵을 일곱 개 집어 들었다. 하나 둘 가지고 갈 줄 알았던 주인의 얼굴에 미소가 어른거린다. 상쾌하게 칠천 원을 계산하고 인사를 건넸다.
"많이 파세요"
단팥빵, 카스텔라, 크림빵. 내 손엔 빵들이 가득이다. 그리고 집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나를 보자마자 "엄마~"하고 뛰어왔다. 첫째는 내 손에 들린 빵들을 보며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크림빵을 먼저 집어 들었다. 둘째도 그런 언니를 보자 단팥빵은 내가 먹겠다며 둘이 싸우기 일보 직전이었다.
"엄마가 또 사줄게"
둘을 겨우 중재하며 또 사주겠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아버지는 술에 취한 날이면 어김없이 투게더 아이스크림을 사 오셨다. 술 냄새가 배어 있어도 상관없었다. 혀끝에서 녹아 목을 타고 넘어가는 바닐라 아이스크림 한 숟갈이면 모든 게 괜찮아지던 때였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우리를 아버지는 말없이 바라보곤 하셨다.
이젠 내가 부모가 되어 빵을 먹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아이들은 크림빵과 단팥빵을 먹느라 정신이 없다. 30년 전 아버지처럼, 나도 아이들에게 똑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얘들아, 천천히 먹어. 또 사줄게"
이렇게 월급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언제까지 받을지 기약 없는 월급날이 저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