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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휴직 동안 잘한 거 3가지, 후회되는 거 3가지

돌아갈 곳이 있어도 기본은 해놨어야 했다.

by 루나리

복직한 지 2개월이 다 되어간다.


잠든 아이들을 두고 나오는 게 조금은 익숙해졌다. 남편이 재택근무를 통해 아이들을 봐주고 있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봄이 되면 남편의 재택근무는 끝이 난다.


새벽에 일어나 채비를 하고, 쌍둥이 유모차에 애들을 태운 뒤, 어린이집에 맡겨야 하는 일상이 얼마 남지 않았다. 벌써부터 걱정되는 건 날씨다. 비 오는 날과 눈 오는 날엔 오롯이 날씨를 감내해야 한다. 나를 지켜주는 건 최고급 우비와 무릎까지 오는 장화뿐이다.


“띵동~”


흘끗 나의 모습을 본 선생님들은 버선발로 뛰어나온다.

외마디 탄식과 함께


“어머나, 어머니…”




쌍둥이 유모차로 등하원을 했던 나는 무릎까지 오는 긴 장화에 최고급 우비를 갖춘 ‘전문 등원인’이 됐다. 이 글을 읽은 워킹맘들과 워킹대디들은 꼭 기억해 주길 바란다. 꼭 고급 우비여야 한다. 웬만한 우비로 걸어서 15분 등원은 불가하다.


하지만 복직을 하고 보니 이랬던 일상도 그립다. 이젠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비를 입고 전철역으로 내달려야 한다. 무릎까지 오는 장화를 신고, 최고급 우비를 입고 지하철역으로 뛰는 내 모습이라니… 꿈만 같다. 그다지 꾸지 않고 싶은 꿈.


봄아, 오지 말아 줘.


워킹맘들과 워킹대디들은 말이 잘 통한다. 모두 사면초가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치앙마이행 비행기 안에서 승무원들과 짧은 시간 동안 서로의 삶을 토로할 수 있었던 건, 우리 모두 아이를 키우며 회사를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물음과 대답은 똑같다.


“할만하세요?”

“아니요”



나는 3년 동안 육아휴직을 했고, 아이를 둘 연달아 낳았다. 육아에 최선을 다했고, 돌아갈 직장이 있었기에 하루하루 불안에 떨며 살았다. 모든 상황을 미리 경험한 선배들이 제발 미래는 잊고 현재를 살라 조언해 줬지만, 나에겐 그만한 멘털이 없었다.


나의 삶은 신림동 자취방 안에서 하루종일 게임을 하는 수험생과 같았다. 곧 들이닥칠 미래가 빤히 보이는 피하고 싶은 그러한 삶.


드디어 복직을 했다. 생각보다 복직 후의 삶은 녹록하지 않다. 연차만 쌓인 중고신입. 게다가 새로운 업무, 새로운 영역.

2개월 동안 나의 업무 능력은 거의 늘지 않았다. 2개월이면 50일이 안 되는 시간인데, 마음만 바쁘다. 매일 목표치를 세우고 업무에 임하지만 2개 중 1개밖에 쳐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매일매일 후회한다.

‘아, 내가 육아휴직 동안 너무 놓고 살았구나.’




1. 활자를 놓고 살았다.


휴직 기간 동안 긴 장문의 글과, 어려운 글을 멀리했다. 그러다 보니 각 잡고 어려운 글을 읽으려 해도 해석이 안 됐다. 영어도 아니고 한국어 해석이 안되다니… 그래서 놓아버렸다.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에 ‘어떻게든 되는 건’ 하나도 없다. 나는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궤도에 오르려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장문의 글을 읽으면서 바로바로 요약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 능력이 상실된 상태다.

복직 후 내가 가장 애쓰는 영역 중 하나는 문장을 요약하는 스킬이다. 고되다. 내가 3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하루에 10분이라도 활자를 익히고 문장 요약 습관을 유지했을 텐데, 3년 넘는 시간 동안 뇌가 굳어버렸다.


2. 일방적인 소통에 익숙해졌다.


아이들과 하루종일 있다 보면, 쌍방향의 소통이 아닌 일방향의 소통으로 하루를 보내게 된다. 일단 언어가 안 되고, 아이들과 대화를 하기까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돌봄 선생님, 가사 도우미, 어린이집 선생님 등 많은 사람들과 소통을 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나의 크나큰 착각이었다.

원치 않은 대화와, 몇 번의 필터링을 거친 대답과, 원치 않은 화법에 버무려진 화법이 회사생활 화법이라는 걸 잊었다. 3년 동안 그 소통법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아주 혹독하게.


3. 업무를 쥐고 있어야 했다, 약하게라도.


내가 복직 후 가장 어려웠던 건 업무에 대한 감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본능에 의한 24시간을 살다가, 본능을 억누르고 나를 감춰야 하는 회사에서의 시간은 내게 벅차게 다가왔다. 나를 누른 상황에서 업무까지 새롭게 다가오니 나의 일상은 엉망이 되어가고 있다.


체계적이고 고차원적인 사고를 해야, 나의 말에 힘이 실리는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은 나를 당황케 했고 나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놈의 근거. 모든 일에는 근거가 필요했고, 그 근거에는 깊은 사고가 뒷받침되어야 했다.

감 떨어진 채 1달을 보내다가, 2월부터는 내 대답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외롭고 어렵다.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관련 문서라도 틈틈이 읽을 것을… 현업에 뛰고 있는 게 아니니 약하게라도 쥐고 있었어야 했는데, 대가가 참으로 혹독하다.


8월 여름날, 폭우가 쏟아지는 횡단보도를 걷고 있는 기분이다. 쌍둥이 유모차와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육아휴직 기간을 잘 보냈다고 생각한다. 업무적인 부분에선 아쉬움과 후회가 ‘많이’ 남지 만, 아이들과 함께 도처에 뿌려진 행복을 찾기 위해 종종 길을 나섰기 때문이다.


내가 육아휴직 동안 잘했다고 생각한 3가지는 아래와 같다.


1. 날씨 좋은 날엔 가정보육을


첫째는 연말생이다. 발달이 빠른 아이도 아니다. 그래서 최대한 늦게 어린이집을 보냈다. (27개월) 첫째가 19개월 때 둘째가 태어났고 이렇게 우리 셋의 시간은 무르익었다.

날씨가 좋은 봄날엔 가정보육을 하고 집 근처 공원이나, 도서관에 갔다. 사람이 없는 그곳에서 우린 속삭이며 온몸으로 봄을 맞이했다. 새싹을 보았고, 햇살을 느꼈으며, 맛있는 김밥을 먹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기다림 없이 모든 걸 이용할 수 있었다는 거.


2. 자연을 최대한 가까이했다.


아이들을 느리게 키우는 게 좋다는 강연을 보고 ‘자연주의 육아법’에 꽂혀 버렸다. 미세먼지 나쁜 날을 제외하고 매일 집 근처 공원에 나섰다. 똑같은 일상이었지만 아이들은 어제와 다른 오늘을 맞이하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세세한 것까지 기억하는 아이들을 보며 성장과 습득력에 감탄했다.


나의 하루와 아이들의 하루는 달랐던 것이다. 모든 게 새롭고 재미있는 하루가 되길 바랐다. 그래서 난 매일 집을 나섰다. 아이들이 까르르 많이 웃는 하루였길 바라며 육아휴직 기간 동안 육아에 전념했다. 하루 종일 육아를 했지만 고되지 않았다. 내가 선택해서 세상에 나온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3. 기나긴 장기 여행을 다녀왔다.


복직을 앞둔 겨울날, 아이들과 함께 치앙마이로 20일 살기를 다녀왔다. 남편 없이 말이다.

식중독에 걸리기도 하고, 도로사정이 좋지 않아 차도에서 택시를 잡기도 하지만 아이들은 계속 성장하고 있었다.


아무 얘기 안 하던 첫째가 갑자기


“사왓디카”를 외치기도 하고

“땡큐”라고 말하기도 했다.


지나가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나도 저 비행기 타고 또 여행 가고 싶어’라고 말하는 첫째를 보며 역시 고생 없는 보람은 없다는 걸 깨닫는다. 준비기간도 고되고, 여행 기간도 만만하진 않았지만, 끝은 달콤하다.


우리는 그 기억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육아휴직을 할 수 있다면? (그럴 일은 없다)


다시 돌아가도 예전처럼 날씨 좋은 날 김밥을 싸들고 소풍을 나설 것 같다. 그리고 그때처럼 불안에 떨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것 같다.


보고서는? 활자는?

… 다시 돌아가도 볼 것 같지 않다.


나는 어쩔 수 없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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