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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서를 썼다

왜 요즘은 다 전자결재인가

by 루나리

오늘도 아이가 아팠다. 둘째는 한 살인데 어린이집의 감기 바이러스가 너무나도 강력해 2주 넘게 감기가 떨어지지 않고 있다. 급하게 반차를 썼다. 내일 회의가 있는데 마음은 콩밭이다. 그 콩밭은 아이의 감기가 아닌, 내일 회의이다.


퇴근 태그를 하고 지하철에 타면서 어린이집에 전화를 했다.


“제가 일이 많아서 소아과 갔다가 다시 애들 맡길게요”


속으로 생각한다.

일 많다고 자랑하는 것도 아닌데, 왜 난 굳이 일이 많다는 것을 강조했을까? 전화받는 이 분들도 지금 모두 일을 하고 있는 건데.


또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든다. 너 왜 이렇게 소심해졌냐고, 일이 많다고 하면 어떻고 안 많다고 하면 어떻냐고. 이런 소소한 것까지 신경 쓰면서 어떻게 사냐고.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복잡해졌다. 나는 회의 하나에 졸아버린 나이 많은 신입이다. 연차는 쌓였지만 경력은 부족한, 어 중간한 중고 신입.


하나 확실한 것은, 나는 요즘 매우 소심해졌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조심스럽고 무섭다. 자신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모르면 모른다고 자신 있게 얘기하는 회사 MZ가 부럽다. 나는 모른다고 말하는 게 부끄럽다. 알고 있어야 할 것을 모르는 것 같고, 끝없는 질문에는 입을 닫게 되니. 죄송하다고 하는 것도 한두 번, 머리를 조아리는 내 모습이 싫다. 왜 나는 당당하지 못하는가.


한숨을 쉬는 게 버릇이 됐다. 폐에 공기를 한가득 넣고 푹 빼면 왠지 몸이 쭈욱 퍼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내일 회의가 너무 걱정된다.


아이의 진료를 보면서도 한편으로는 과제 생각을 했다. 내 업무 관련된 이야기를 묻고 싶지만 말을 삼켰다. 말은 안 할 때보다, 할 때 더 후회되는 게 많았다. 그래서 회사에서 나의 말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모든 것을 원천 차단하고 싶다. 이야기를 하기 전에 늘 생각하고 말을 하는 게 버릇이 됐다. 그래서 집에 오면 뻗어버렸다. 마치 한여름에 녹아버린 타이어처럼. 9시 30분만 되어도 졸려서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됐다. 나의 몸은 지쳐가고 있었다.


복직한 지 겨우 3개월.

끝을 생각하면 걷잡을 수 없을까 봐 감히 내다보지 못했는데 슬슬 끝을 생각하게 됐다.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다. 회사에서도 최선을 못 하는데, 아이에게도 마찬가지다.


아픈 아이는 울었다. 1시간 넘게 우니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말을 못 하는 아이는 우는 것으로 모든 대화를 대신했다. 처음엔 안아주다가 뒤로 뻗치는 아이를 안고 달래고 업고 나니 땀이 온몸을 뒤덮었다. 미치겠다. 아이는 울고, 내일 회의는 압박스럽고, 지금 나는 회의 준비를 하나도 못 하고 있다. 그리고 더욱 당황스러운 건, 아픈 아이가 울고 있는데 나는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거다. 어느 것 하나 잡지 못하고 있다.


오늘도 남편에게 물었다.


“나, 그만둘까?”


복직 3개월 차, 서울역 워킹맘은 100일 만에 아웃을 외쳐버렸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쉬웠다. 내 입에서 나와버린 그 단어, 사. 직.




먼저 워킹맘의 길을 걸었던 친구가 조언을 하나 해줬다. 사직서를 쓰고 서랍에 두고 다니라는 거였다. 그런데 이런 비슷한 조언을 다른 친구도 해줬다. 그래서 오늘은 그룹웨어에 접속해 사직서를 검색했다.


아 그런데 요즘은 다 전자결재다. 사직서를 따로 쓸 수가 없다. 결재를 득해야만 프린트를 할 수 있는 거다. 아, 결재는 아닌데 난 일단 쓰기만 하는 건데…


구글에 사직서를 검색했다. 대충 따라서 썼다. 일자, 사유. 들어오는 건 엄청 힘들었는데 그만두는 건 왜 이리 쉬운지. 경쟁률만큼 내 뒤에 내 자리를 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쭉 줄 서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이 내게 소리 없이 외치는 것 같다. 너의 사직을 기다렸다고, 이제 내 차례라고.


애들을 훈육하면서도 괴로운 건, 직장에서 혼나는 나의 모습과 오버랩되어서다. 말을 못 하는 둘째는 혼나면 혼나는 대로 그래도 모든 걸 받아들인다. 가끔은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본인 나름대로 억울하다는 것을 표출하는 거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가끔은 부럽다. 나도 소리 지르고 싶을 때가 있다. 상상 속에서. 기반을 제대로 닦지 못하고 들어간 육아휴직의 종말은 쓰고 텁텁하고 힘들다.


애들은 애들대로, 회사는 회사대로 쉽지 않다.

다만 3개월 동안 달라진 내 모습은, 생각보단 의연해진 거, 그리고 웬만한 것에 눈물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회의날 아침, 바뀐 컴퓨터 바탕화면을 보고 나도 모르게 울컥하고 말았다.

회의날 윈도우 배경화면이 이걸로 바뀌었다


엄마 원숭이가 아기 원숭이를 쳐다보고 있는 사진이다. 순간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그토록 가기 싫어하는 어린이집 가지 말고 엄마랑 놀러 가자고. 집 근처 놀이터에서 새싹도 보고, 개나리도 보고 봄을 느끼자고. 엄마 여기 있다고 다 제쳐두고 뛰어가고 싶었지만, 현실은 순간 울컥하고 말았다.


그런데 자꾸 아이들 생각이 난다. 어린이집 가기 싫다고, 엄마랑 같이 있고 싶다고 계속 울었는데, 그런 아이를 안아주지도 못하고 본체만체했다. 머릿속엔 회의 생각이 가득이었기 때문에.




아직 전자결재로 사직서를 내기엔 이르다. 나는 이 직장에서 하고 싶은 게 있다. 계획도 있고 맡은 일도 있다. 그리고 이 일을 잘 해내고 싶다. 단단해지는 과정일 뿐이라고 나 스스로를 달래고 있다. 나만 잘하면 모든 게 끝나는 거라고.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된다고. 나는 잘하고 싶다. 일을 잘하고 싶다..


항상 비슷한 레퍼토리지만 오늘도 일거리를 싸들고 집에 왔다. 회의는 끝났다. 나는 우리 둘째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듣고 있었다. 말을 하기엔 조심스럽고, 말을 안 하자니 답답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날 밤 잠을 쉬이 이루지 못했다.


언제쯤 익숙해질까, 익숙해지는 날이 오기는 할까. 어떻게 하면 일을 잘할 수 있을까. 나, 잘 하고 있는 거 맞는걸까. 다음엔 어떻게 해야할까.


워킹맘의 3월이 이렇게 지나간다.

스스로의 위로와, 바람과, 한숨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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