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딘 라바키 <가버나움>
* 스포일러 有
"제가 부모를 고소했어요."
"왜 부모를 고소했죠?"
"나를 태어나게 해서요."
온몸이 꼬질꼬질하고 깡마른 남자 아이가 서 있다. 한 성인 남자가 아이의 입속을 관찰한 후 그 아이가 적어도 열두 살, 혹은 열세 살일 거라고 판단했다. 장면이 교차되고, 골목길에서 다른 아이들과 뛰어놀던 아이의 모습이 등장한다. 사람이 살고 있지만 황량하기 그지없는 흙빛 골목에서 아이는 무방비하게 유해함에 노출되어 있었다. 다시 이전의 화면으로 돌아와 아이의 손에 수갑이 채워지고, 또 다른 성인 남자가 아이를 재판장으로 보이는 곳으로 데려간다. 아이의 부모도 등장한다. 부모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로 상황을 설명한다. 아이의 생년월일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해 그 누구도 이 아이가 몇 살인지 알 수 없다. 부모의 기억도 기록도 아닌 의사의 판단으로 열두 살 쯤 되었을 거라고 추정 당한 아이, '자인'은 판사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모든 질문에 또박또박 대답한다. 판사가 물었다. 상황을 알고 있냐고. 자인이 답했다. "제가 부모를 고소했어요." 판사가 왜냐고 묻자 자인이 다시 답했다. "나를 태어나게 해서요."
영화가 시작한지 10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가슴이 무너져내린다. 친절한 설명 하나 없이 나열된 장면들일 뿐이지만 그 장면에 흩뿌려져 있는 현실의 파편들이 관객의 가슴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골목길에서 뛰어놀던 아이를 에워싸고 있던 담배 연기, 아이의 몸에 묻어있는 흙먼지, 부모가 있는데도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투옥된 아이, 그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자신들을 우습게 볼 거라며 항의하던 부모, 그 모든 과정을 겪고 지켜보며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나를 태어나게 한 이유로 부모를 고소했다고 말하는 아이. 영화 속 모든 요소와 설정들이 지닌 현실의 무게가, 따뜻한 방에 편히 앉아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내 마음을 짓눌렀다. 자인과 내가 시소를 탄다면 나는 한없이 높은 곳으로 튕겨져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영화는 과거로 돌아가 자인의 행적을 좇는다. 말 그대로 생지옥이 펼쳐진다. 자인은 밤에는 몇 명인지도 모를 만큼 많은 형제들과 뒤엉켜 잠들고, 낮에는 말도 잘 하지 못하는 어린 동생과 함께 거리로 나가 일을 한다. 집에서 엄마와 마약주스를 만들 때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기의 한쪽 발을 사슬로 묶어둔 채 작업한다. 아기는 넘어져 울고, 엄마는 담배연기를 뿜으며 마약 주스를 만든다.
아이들은 아이일 수 없는 상태로 무방비하게 방치되어 있거나 노동에 혹사 당하고 있고, 그 어떤 어른도 그들을 책임지지 않는다. 자인이 자신의 몸 만한 물 통을 힘겹게 옮기고 있어도 누구 하나 나서서 도와주지 않는다. 어른들은 아이의 노동이 자신에게 준 시간을, 술담배와 약에게 허무하게 내어준다.
그러던 어느날 자인의 동생인 사하르가 초경을 시작했다. 사하르의 잠자리와 바지에 묻은 피를 본 자인은 사하르를 데려가 몰래 팬티와 바지를 빨아주며 엄마에게 들키지 말라고 말한다. 그럼 엄마가 너를 아사드에게 팔아버릴 거라고. 아사드는 자인의 집 근처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는 남자로, 자인의 집주인이자 고용주인 인물이다. 생리가 무엇인지도 잘 모를 자인은 자신의 상의를 벗어 사하르에게 팬티 사이에 끼우라며 주고 자신이 일하는 식료품점에서 몰래 생리대를 훔쳐다준다. 생리대를 쓰레기통에 버리면 엄마가 알게 될 테니 쓰레기통이 아닌 다른 곳에 버리는 법까지 일러준다. 나는 그 둘을 보며 무너지는 억장을 겨우 붙잡고 있었는데, 그래도 두 아이는 함께 높은 곳에 올라가 바람도 쐬고 노래도 불렀다. 그 와중에도 그들에게 존재하는 행복이 다행이면서도 사무치게 아팠다.
며칠 후 자인이 집에 돌아오자 집엔 웬 닭들이 몇 마리 푸드덕거리고 있다. 아사드가 왔다는 말에 부리나케 달려가보니 사하르는 어린 얼굴에 화장을 하고 어른들 곁에 앉아 있다.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을 직감한 자인은 엄마를 말리지만 소용 없었다. 아침이 밝고, 자인은 사하르와 도망갈 계획을 세워 짐을 챙겨 나선 후 사하르를 데리러 돌아온다. 그러나 사하르는 팔려가기 직전이었고 자인은 이를 막지 못한다. 이럴 때만 아이보다 힘이 센 어른들은 자인을 막아서고 사하르를 들쳐 업어 사하르를 아사드에게 보내버린다. 열한 살 짜리 딸을 닭 몇 마리에 팔아버린 엄마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듯이 눈물을 훔쳤다.
자인은 그길로 집을 나왔다. 며칠간 굶으며 방황하다 다행히 라힐이라는 에티오피아 출신 여자를 만나 그의 아들과 함께 지낸다. 라힐이 일을 해야 하기에 라힐이 없는 시간엔 어린 아들 요나스를 돌봐야만 했지만, 그렇게라도 성인의 보호를 받으며 집에 머무는 자인이 편안해보여 가끔 웃음도 났다. 자인도 웃었다. 영화가 시작된 후 처음이었다. 그러나 불법 체류자였던 라힐은 체류증을 위조할 돈을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다가 발각되어 잡혀가고 만다. 또다시 자신을 보호해줄 성인을 잃은 자인은 요나스와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텨간다. 그러다 결국 다른 아이들의 스케이트보드를 뺏어 냄비를 매달아 요나스를 태우고 다닐 수레를 만들었다. 냄비에 실실린 요나스와 그 옆에 주렁주렁 매달린 냄비가 탈탈 소리를 내며 스케이트보드와 함께 굴러다녔다. 그 요란한 소리에도 어른들은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이후 자인은 마약을 구해 마약 주스를 만들기 시작한다. 요나스가 멋모르고 마약을 찍어 먹으려 하자 자인은 요나스의 한쪽 발을 묶어두었다. 속절 없이 반복되는 삶의 굴레가, 또 다시 잔인하게 자인의 삶을 쥐어짜는 가난이 원통했다. 늘 요나스를 태우고 다니던 냄비에 마약 주스를 싣고 달리자 그제야 어른들은 자인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약 주스 팔이도 오래 가지 못한다.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게 되자, 자인은 요나스를 버리려 한다. 그러나 자신을 따라오는 요나스가 눈에 밟혀 쉬이 떠나지 못한다. 그저 먼발치에서 눈물을 흘리는 행위로 자신을 용서하던 자인의 엄마가 오버랩됐다. 그렇게 어떻게든 요나스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치던 자인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도 모른 채 요나스를 좋은 곳에 맡겨주겠다는 인신매매업자의 말을 믿고 그에게 넘긴다. 자인은 쉽게 요나스를 떼어놓지 못하고 끌어안은 채 뽀뽀했다. 자인이 가지고 있는 따뜻한 마음과 정이 또 거대한 바윗돌처럼 맘속에 내려앉았다.
인신매매업자인 아스프로는 자인을 스웨덴으로 보내주겠다며, 네가 사람임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가져오라고 시킨다. 자인을 비롯한 아이들에게 스웨덴은 '병에 걸려야만 사람이 죽는' 유토피아 같은 곳이다. 자인은 집으로 달려가 서류를 찾지만, 또 술에 취한 아빠는 서류 따윈 없다며 서류 없는 삶을 인정하고 살든지, 창밖으로 뛰어내리든지 둘 중 하나라고 자인을 때리고 윽박 지른다. 그리고 자인은 알게 된다. 아사드와 결혼한 사하르가 죽었다는 걸.
자인은 식칼을 빼들고 집을 나서 내달렸다. 자인의 부모는 그제야 전속력으로 아들을 쫓았다. 그러나 이번엔 자인을 막아서지 못했고, 자인은 교도소에 투옥되었다. 자인을 면회 온 엄마는 신은 하나를 가져가면 다른 하나를 준다며, 자신의 임신 사실을 밝힌다.
어른들한테 말하고 싶어요.
애들을 돌보지 않는 부모가 지긋지긋해요.
여기서 제가 얻는 게 뭐죠?
욕 먹고 얻어맞고 발길질 당하고 사슬과 호스와 허리띠로 맞고
제가 듣는 말이라곤 "꺼져, 개새끼야!" "쌍놈의 새끼!" 뿐이에요.
사는 게 개똥 같아요. 내 신발보다 더러워요. 지옥 같은 삶이에요.
통닭처럼 불속에서 구워지고 있어요. 인생이 좆같아요.
자라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존중 받고 사랑받고 싶었어요.
하지만 신은 그걸 바라지 않아요.
우리가 바닥에서 짓밟히길 바라죠.
자인은 교도소의 텔레비전으로 아동 학대 고발 프로그램을 보게 되고, 그 프로그램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부모를 고소하고 싶다고 밝힌다. 그렇게 생방송을 통해 생생히 퍼져나간 자인의 목소리가 화제가 되어 공식 재판이 열렸고, 자인이 원고로 재판장에 다시 서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놀라운 기적과 교훈에도 불구하고 가버나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았으므로 예수님은 가버나움이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마 11:21-24; 눅 10:15).
영화의 제목인 '가버나움'은 '신마저 버린 땅'으로 묘사되는 성경 속 지명이다. '생지옥'을 나타내기도 한다. 러닝타임 두시간 내내 펼쳐지는 지옥을 보며 '슬프다'라는 말이 무책임하게 들릴 정도로 복잡하고 깊은 슬픔과 분노가 끊이질 않았다. 화면 바깥의 실제 세상에서 저렇게 살아가고 있을 사람들이 수천수만에 이를 것을 생각하니 너무도 막막했다. 십대 초반의 어린 아이가 왜 사는 게 개똥 같다는 걸, 인생이 좆같다는 걸 알아야만 했는지 분노하게 되고,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아이가 자라면 이루고 싶었던 자신의 꿈을 벌써부터 포기하고 신을 저주하게 만든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모든 것 앞에선 이들의 삶을 보며 느끼는 나의 분노와 원망이 너무 초라했다. 초라한 한탄 외에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나의 나약함이 가장 원망스러웠다. '타인의 고통'은 나를 얼마나 나약하게 만드는가. 아무리 많은 아이들이 생의 무게를 주렁주렁 달고 바닥을 기는 삶을 살고 있어도 나는 이렇게 편안히 이불 속에서 겨울을 나는 것이 그렇게 나약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뱃속의 아기도 나처럼 될 거예요."
"부모에게 원하는 게 있나요?"
"애를 그만 낳게 해주세요."
"더 낳진 않을 것 같네요."
"뱃속에 있는 애는요?"
"……."
"쟤는 태어날 거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희망을 비춘다. 아이를 더 이상 낳지 않게 해달라는 자인의 말을 들은 아비의 표정에서 처음으로 진심 어린 후회를 읽었으며, 요나스는 어둠 속에서 구출되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사진, 신분증에 들어갈 사진을 찍기 위해 활짝 웃는 자인을 보여준다. 두 시간 동안 끊임없이 밀려오던 막연한 두려움이 자인의 웃음 하나에 녹아 사라지는 듯 했다.
엔딩크레딧에서는 자인과 사하르, 요나스 등의 배우들이 전문 배우가 아닌 생계를 위해 레바논의 길거리에서 직접 고용된 실제 난민이었다는 것을 밝힌다. 칸 영화제 초청 이후 자인과 가족들은 유니세프의 도움을 받아 노르웨이에 정착했고, 14살의 나이로 태어나 처음으로 학교에 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요나스와 사하르, 메이소운을 연기한 배우들도 영화 촬영을 계기로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단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저 잔혹한 삶이 조금이라도 다른 방향으로 흐를 수 있게 할 수 있을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서, 저 삶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 중 누구도 쉽게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절망에 빠져 있던 마음이, 감독이 영화를 통해 실제로 구현해낸 변화를 딛고 희망으로 건너갔다.
물론 모든 난민과 아이들을 영화를 통해 도울 수는 없다. 자인을 구해내도 여전히 지옥에서 울고 있는 아이들의 울음 소리가 어디가 끝인지도 모르게 펼쳐진 지옥의 곳곳에서 메아리 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한 아이라도 더 이상 돈을 벌지 않고 학교에 다닐 수 있다면, 그 잔인한 뫼비우스의 띠에서 빼낼 수 있다면 두 번째 아이도, 열 번째 아이도 구출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품게 된다.
감독인 나딘 라바키는 이 영화를 찍기 위해 자신의 집까지 팔았다고 한다. 이 영화를 보며 그동안 내가 고통이라 여기고 위대하다 여겼던 모든 것들이 얼마나 좁은 범위 안에 있었는지를 깨닫는다.
아이가 아이답게 살기 위해 기적이 필요한 곳들이 있다. 영화 <가버나움>은 그 자체로 기적이며, 기적을 만들어냈다. 앞으로 내 인생엔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좋으니 이미 '평범함'과 '상식'을 누리고 있는 자들의 인생에 일어날 기적이, 기적이 간절한 곳에서 쓰이면 좋겠다는 하찮은 바람이라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