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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영 Sep 29. 2016

천 개의 기원

가짜 사랑

***


역사의 뿌리나 열매를 신성화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건이 묻혀 있어야 했는가! 그러나 ‘모든 사물의 기원은 천 겹이다.’ 지혜로운 탐사자라면 무지하고 소심한 자들이 지나친 많은 것들 속에서도 파편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천 겹의 주름 속에 숨겨진 사건들이 햇빛 속에 놓이게 될 때 신성한 것들의 거짓이 떨어져 나가리라.


***


‘결혼’이라는 숲을 보려고 했다.

숲이 깊을수록 나무들은 대충대충 대강대강 보고 넘겨야 한다.

‘나’는 생략된 나날들이 슬펐다.

그래도 그냥 슬프기로 했다.


실체도 없이 존재하는 ‘결혼’이라는 괴물은 실로 거대했다.

약속할 수 없는 걸 약속해버린 ‘혼인서약서’는 불합리하고 불가능한 요구였다.

이질적이고 다양한 풍습과 법과 제도로 빚어진 도박이었다.

내가 가진 패가 나쁘단 걸 확인하며 천천히 느리게 발을 뺄 준비를 할 뿐이었다.


결혼하면 다 그래, 아이 있으면 그렇지 뭐, 애들 봐서 참고 살아야지, 남편은 그냥 남.(의) 편. 이잖아.

오히려 내가 더 일반화했고 동일시했다.

마음이라도 편하자고 그랬는데 효과는 별로였다.

소란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가만히 조용히 생활했다.


결혼처럼 이혼을 덜컥 선택할 수는 없었다.

알아보고 제대로 하고 싶어서 책을 뒤지고 자료 검색을 했더니 이것도 마찬가지였다.

다 달랐다.

공부 좀 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과목이 아니었다.


이혼이고 뭐고 당장 집어치웠다.

아이들이 클 때까지는 책임을 지자, 했다.

기한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로 정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견디겠노라고 나와 약속했다.


작은 아이 수능일이 D-day였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결승선을 향해 전력질주를 했다.

그래서일까?

결혼에 후회는 없다.


많이도 울었다.

결국엔 포기를 선택하는 나에게, 다른 가족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아쉬움이 왜 없었겠나.

욕심이 하늘을 찌르는 나인데.


그냥 미안하기로 했다.

미안하다는 말밖에 하지 못해서도 미안했다.

욕하면 욕먹겠다고 했다.

원망해도 다 받겠다고 했다.


왜 ‘나’를 그따위 선언을 해가며 선택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랬다.

나는 나를 선택했고 그 길을 따라갔다.

신나고 행복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무겁고 무거울 뿐이었다.


이미 너무 많이 무거워진 나는, 가벼워져야 했다.

나를 무겁게 누르거나 잡아당기는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보았다.

부모, 남편, 아이들…….

나는 하나씩 떼어서 분리했다.


아빠는 돌아가셨으니까 돌아볼 수도 없고,

엄마는 내 화가 남아서 대화가 어렵고,

남편은 가끔 좋을 때 만나기로 했고,

아이들이 남았다.


허전해서인가?

뒤치다꺼리 귀찮다고 잔소리하기도 싫은데 왜 같이 살까?

내게 남은 미안함, 책임감, 정리되지 않은 감정 찌꺼기들,

할 줄 모르는 ‘사랑’이라 여기는가 보다.


받은 적 없고 배운 적 없어 할 줄 모르는 사랑.

가진 적 없어 줄 줄 모르는 사랑.

남들 봐가며 이것저것 여기저기 기웃거려 흉내 낸 사랑.

내 가짜 사랑을 확인하는 거울이다. 내 아이들은.


진짜가 되고 싶은 내 욕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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