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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영 Mar 27. 2017

살아야겠다

8일째

엄마와 저녁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둘이서 함께 식사하는 일은 쉽지 않다

거기다가 대화까지 한다는 건 무한도전이다

나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고된 일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을 해야만 하는 습관적인 행동에 반응한다

화가 나지만 피할 힘도 없어서 마주 앉은 부끄러움에 치가 떨린다

스스로 무기력을 인정하기가 거북하고, 감당하기가 버겁다

엄마에게 나의 불편을 설명하기도 괴롭고 성가신 일이다


내 화인 걸 알고 대화를 시도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아무 말하지 말고 그냥 듣기만 해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었다

넘어야 할 산이라 여겨서 시도해 보았으나 허망하게 무너졌다

그때마다 어린아이가 튀어나왔고 어른이 아닌 채로 널브러져 버르적거렸다


집에 돌아와 다시 제자리에 서기까지 며칠씩 걸리곤 했다

속 쓰림에 위장약을 빨아먹어도 소용없이 속은 여전히 답답했다

아이들 때문에라도 해결하고 싶었지만, 쓸데없는 욕심이었다

한동안 몸도 마음도 쑤시는 것처럼 아프고 괴로웠다


피할 수 있는 일은 피하는 게 맞다

언젠가부터 최선을 다해서 피해왔다

남편이 전화를 걸지 않았다면 엄마를 찾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 앞에서 만나는 그 어린아이를 나는 아직 감당하지 못한다


남편이 들러서 같이 가자고 한다면 따라나설 것이다

영리한 남편은 본능적인 계산이 빨랐고 정확하게 맞았다

나는 엄마와도 싸우지 않고 남편과도 싸우지 못한다

불행히도 내 엄마가 원하는 건 참고 사는 바로 그거다


엄마에게 여자로 산다는 건, 남자를 견디는 일이다

내 남자가 원하는 여자가 되어서 그 남자를 요리하는 일이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어서 어르고 달래서 구슬리면 그만이다

그 쉬운 걸 못하면 맞아도 싼 거였고, 아파도 찍소리 못하는 거였다


엄마는 세상 편한 아들을 낳기 위해서 딸을 다섯이나 낳았다

참고 견딘 세월이 얼마인지, 왜 무엇 때문인지 엄마는 알고 있을까?

엄마가 말하는 여자의 행복을 딸에게 권하는 마음은 진심일까?

남편이라는 우산이 없으면 안 된다는 엄마에게 하늘은 비일까 눈일까?


큰딸인 나는 엄마를 인정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어서 헷갈렸다

나도 엄마처럼 살 수 있을까 싶었는데 내 딸에겐 아니었다

딸들에게 나처럼 살라고 할 수 없었으니 나부터 바꿔야 했다

시간이 흘러도 아닌 건 아닌 거였고, 결국은 엄마를 포기했다


내가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엄마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평행선을 달리게 되었을까?

왜 나는 엄마를 이해하려 애썼고, 왜 엄마는 나를 외면했을까?

내가 엄마가 되면서 발견한 원치 않은 상처이고, 오랜 아픔이다


남편은 나를 데리러 와서는 많이 생각했는데 다 덮어주겠다고 했다

엄마는 잘 생각했다고 애들 봐서라도 그래야 한다며 고맙다고 했다

남편이 덮어주는 건 뭐고, 엄마가 고마운 건 뭘까?

내가 이 공기 속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은 과연 무얼까?


남편은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그 사랑은 무엇이고, 왜 사랑할까?

결혼했으니까? 부부여서? 아이들의 부모라서? 책임감인가? 의무감일까?

남편이 나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중독이다

우리는 어느새 무언가에 젖어 버려 정상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상태다

애증이 쌓여서 함께 한 까닭에 서로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잔뜩 흐려 있다

무슨 중독일까?


상처가 익숙해서 아픈 줄을 모른다

죄다 곪아서 피고름이 흐르는데도 다 덮자고 사랑한다고 다시 살자고 한다

썩은 관계를 덮고 사랑으로 다시 예전처럼 할 수 있거나 될 수 있는가?

누구를 위한 사랑이고, 왜 그래야 하는가?


나는 그냥 아프고 싶다

지금 무척 아프다고 말하고 싶다

내 안의 고약한 고름을 짜내고 싶다

아무래도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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