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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이렇게 시작하고 싶지는 않았어

여행에세이 베스트셀러 <그렇게 몽땅 떠났습니다>

by 김지수

여행에세이 베스트셀러 <그렇게 몽땅 떠났습니다>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 사막 위에서 생긴 일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는 날 아침이 밝았다. 계획대로라면 아침 아홉 시에 체크아웃해야 했는데 시간이 다 되어도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홀로 짐을 주섬주섬 챙겨보았는데 전날 오후 아웃렛을 털어버린 여파로 가방이 풍선 같았다. 기념품이나 선물을 더는 담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라스베이거스를 여행한다면 외출 전 기온 확인은 필수다. 앱을 확인해보니 약속이나 한듯 또다시 41도란다. 7월의 라스베이거스는 40도 이하로 내려가는 날이 없어 보였다. 본격적인 국립공원 탐험을 코앞에 두고 다시 생각했더니 아무래도 한여름 라스베이거스 여행은 고민하고 선택하는 게 좋을 듯했다. 그날 오전 호텔에서 출발할 때 아들 녀석이 태어나서 처음 경험해보는 일이 있었다. 모두가 늦게 일어난 탓에 전날 밤 한인 마트에서 사온 컵라면을 뜯어 간단히 아침을 해결했는데, 이 녀석도 동참한 것이었다. 여섯 살 인생 최초로 라면에 입문하는 순간이었다.


“어? 일어났어?”

“아빠, 뭐 먹어?”

“라면.”


아들 녀석이 라면을 먹겠다는 순간 덜컥 겁이 났다.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음식인 데다 매콤한 맛에 유독 약한 아이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피할 수 있을지 막막했다.


‘에이, 열 살 때 먹나 여섯 살 때 먹나 그게 그거지.’


한국에 있는 아이 엄마가 알기라도 하면 “아빠에게 아이를 맡기면 역시 안 돼”라는 핀잔을 듣기 딱 좋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다른 먹거리가 없었기에 모험을 선택했다. 걱정과 달리 아이는 몹시도 잘 먹었다. 물에 씻은 면발이 맵지 않은 데다 짭짤한 게 아주 맛있는 모양이었다. 결국 남아 있던 컵라면 한 개도 녀석이 다 먹었을 정도였다.


모두 잠이 덜 깬 채 짐을 들고 차를 타러 주차장으로 갔다. 몸이 천근만근이었지만 본격적으로 국립공원 대자연 탐방을 시작하는 날이라 호기심이 피로를 앞섰다.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짐도 모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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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호텔방의 모습, 굿바이 베네치안 & 라스베가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났다


라스베이거스 북쪽 사막을 횡단해 우리의 첫 국립공원인 자이언 국립공원을 향하려는 기쁨 때문이었을까. 차에 탈 때 순간적으로 손의 악력이 풀렸다.


“툭툭 퍽 쨍그랑.”


그날 떨어 뜨려 엉망이 된 아끼는 휴대폰이다. 다행히 작동은 일단 되긴했으나 이렇게 쓸 수는 없는 법..

아끼던 스마트폰이 떨어진 것이었다. 이 스마트폰으로 말할 것 같으면 회사에서 하사한 최신식 스마트폰이 아니던가. 기기 할부도 남아 있지 않은 녀석이라 몹시 애지중지 사용했는데 깨져버리다니. 통신사 자체 단말기 보험도 가입하지 않았던 터라 보상받을 수도 없었다.


“어, 그래도 사진은 살아 있네. 화면도 들어오고.”

“조심해야겠다. 유리 파편 때문에 손가락 다치겠어.”


자꾸만 불길한 징조 같았지만 이번 여행이 잘되기 위한 액땜이라고 여기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러나 어느새 나는 미국 남서부에서 국산 스마트폰을 수리할 수 있는 곳이 있는지 이 잡 듯 뒤지고 있었다. 스마트폰을 망가뜨렸다는 자책감 때문이었다. 또한 그보다 스마트폰 카메라가 만들어낼 수 있는 사진이 DSLR 카메라의 그것과는 또 다른 맛이 있었기에 여행을 기록 하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역시 사막 위에서는 스마트폰을 고칠 수 없었다. 라스베이거스 시내에 사설 수리소를 발견했지만 수리 가격이 스마트폰 가격과 맞먹었다. 더군다나 이제 막 첫 국립공원으로 출발한 시점인데 스마트폰 때문에 모든 스케줄을 지체할 수 없었다. 깨진 마음과 깨진 스마트폰을 품고서 뜨거운 도시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도시를 조금 벗어나니 광활하고 메마른 사막이 나타났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죽음의 땅이었을 텐데 강을 가로막고 후버 댐을 지어 도시를 만들 생각을 했다니 라스베이거스의 설계 자와 건축가가 위대하게 느껴졌다.


라스베가스에서 Zion National Park를 가는 길. 가까운 듯 하면서도 2시간 40분이 걸리는 거리다.


첫 목적지인 자이언 국립공원까지 거리는 260킬로미터. 자동차로 세 시간 가까이 이동해야 도착할 수 있었다. 지도상으로 볼 때는 거의 직선에 가까워서 쉽고 빠르게 라스베이거스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큰 오산이었다. 쉬지 않고 달려도 고속도로 끝이 보이지 않았다. 미국 땅의 광대함에 넋을 잃었다. 같은 자리에서 헛바퀴가 도는 기분이 들 만큼 망망대사(茫茫大沙)였다.


라스베가스를 벗어나니 이런 도로가 나타난다


아무리 달려도 쉼터는커녕 인공 구조물 따위도 나오지 않았다. 가면 갈수록 더 넓은 평야와 메마른 돌산, 사막뿐이었다. 아이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일행 모두 멍하니 창밖을 바

라보았다. 차 안에는 적막만이 가득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지 아버지께서 유튜브로 음악을 틀었지만 그마저도 끊기기 일쑤였다. 청중들도 딴짓 하느라 호응도가 낮았다. 생각했던 여행의 낭만과는 거리가 먼 듯한 분위기였다.


이토록 지루한 사막 위 자동차 안에서도 먹을 것은 쉬지 않고 공급되었다. 마트에서 구비한 빵 수십 조각과 달콤한 과일 주스도 하나씩 하나씩 멤버들의 손으로 이동했다. 아들 녀석도 제일 뒷자리에 앉아서 마음껏 빵을 먹었고 과일 주스까지 시원하게 들이켰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또 일어나버렸다


갑자기 오아시스 도시가 나타났다. 회색 사막 위에 초록빛 골프장이 있을 정도로 잘 정돈된 도시였다. 지도를 찾아보니 ‘메스키트’라는 곳이었다. 도박이 법적으로 허락된 네바다주 경계선에 건설된 도시라고 했다. 즉, ‘그대여, 네바다를 떠나기 전 한 번 더 도전해보세요’라며 여행객을 유혹하는 마지막 아웃렛 도시였다. 그리고 그 도시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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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quite, Nevada 도시이다. 황량한 사막에 지어진 도시이다. 출처=인터넷, Wikipedia



“맥. 도. 날. 드.”


점심때가 되었다. 차에서 군것질을 했지만 승객들의 허기는 가시지 않았기에 모두가 만장일치로 미국의 ‘김밥천국’격인 맥도날드로 뛰어 들어갔다. 그런데 아들 녀석 안색이 좋지 않 았다. 바깥 날씨가 너무 뜨거워서일까. 어서 안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걷지도 못하길래 번쩍 안아서 맥도날드에 들어갔는데.


“우웩, 켁, 켁, 켁 퉤퉤.”


아들 녀석이 속에 있던 음식을 다 토해버렸다. 삽시간에 매장은 형용하기 어려운 냄새로 가득 찼다. 언제부터 소화가 안되었는지 토사물 양이 엄청났다. 다행히 주변에 다른 고객은 없었다.


하나뿐인 아들이 곤경에 처했으니 물불 안 가리고 도와줘야 했지만 눈앞이 캄캄해졌다. 먼저 매장을 청소해야 할지, 녀석의 바지와 신발을 닦으러 화장실부터 가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솔직히 바닥에 토사물을 보니 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뒤로 숨고 싶었다.


‘침착해야 한다. 어차피 바닥 청소에는 도구가 필요하다.

아들은 엉망이고 나도 엉망이 되었다. 휴지가 화장실에 있을

테니 일단 화장실부터 가자.’


일차로 화장실에서 사투를 벌인 끝에 분비물을 하수구로 흘려보냈다. 신발과 옷을 닦고 아들을 화장실에서 간단하게 씻긴 뒤 이후 일곱 명이 맥도날드에서 사 먹은 음식 값보다 더 비싼 엄청난 양의 휴지로 서로를 닦고 말려주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녀석의 그것을 치우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무릎을 굽힌 적이 있던가. 10여 년 전 청혼할 때도 이토록 바짝 굽히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꿇어앉아 연신 바닥을 닦았다. 그런데 그 면적은 미국 땅만큼 커서 잘 해결되지 않았다. 미국 꼬마들이 코를 막고 킥킥거리며 지나가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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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 하다 아들아, 그토록 많이 토하고도 너는 햄버거를 먹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직원을 불러 팁을 주며 도움을 요청했다. 혹여나 언어도 잘 통하지 않는 외국 땅에서 공격이라도 받으면 안 된다는 마음 때문에 광이 나도록 바닥을 닦고 또 닦았다. 어느 정도 사태가 수습되니 그제야 아들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오지에서 갑자기 환자가 되어버린 녀석을 보니 너무 안쓰럽고 미안했다. 정작 몰골이 가장 안쓰러운 대상은 바로 나였는데도 말이다. 오전에 난생처음 먹은 라면과 차에서 마신 음료수 등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상황을 종료했다.


미국 서부에 입성한 뒤 아니, 40년 인생 동안 이렇게 정신이 혼미해진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큰 신고식을 치렀다. 다행히 맥도날드 어린이 메뉴에 나오는 장난감 때문에 환자의 상태는 즉시 퇴원해도 될 만큼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내 기분을 어떻게 매듭지어야 할지 막막했다. 이제 막 시작된 여행 길인데 출발 한 시간여 만에 스마트폰도 환자, 아들 녀석도 환자가 되었다는 점은 너무 큰 이벤트가 분명했다. 여행이고 뭐고, 드는 생각은 딱 하나였다.


‘무탈하게 살아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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