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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이라지만 더워도 너무 덥잖아

여행에세이 베스트셀러 <그렇게 몽땅 떠났습니다>

by 김지수

여행에세이 베스트셀러 <그렇게 몽땅 떠났습니다>

시애틀에서 라스베이거스까지 1,400킬로미터를 날아가다


어제 세 시간 동안 무자비한 입국 수속 이벤트가 벌어졌던 시애틀 공항으로 다시 향했다. 라스베이거스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였다. 공항의 정식 명칭은 시애틀-타코마 국제공항이다. 타코마라는 곳은 시애틀 남쪽에 있는 도시 이름이니 서울로 치면 서울-수원 국제공항인 셈이다. 미국에 와서 미국의 저가 국내 항공기를 타게 될 줄은 꿈에 도 몰랐다.


그런데 카운터에서 체크인하려니 한 명당 1달러를 내라고 했다. 무인 시스템에서 체크인하면 무료였으나, 짐을 보내려면 다시 카운터에 와서 직원에게 부탁을 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졌다. 또한 직원의 친절한 미소마저 유료인 건 지 모든 서비스가 ‘저가’스러웠다.


시애틀 공항의 모습이다. 인천 공항을 생각하면 ... 할 말이 없다.


체크인 수속 후에는 미국 공항의 거친 입국 검사대를 지나야 했다. 9.11 테러 사건 이후 생긴 전신 스캐너에 모든 것을 쏟아낼 차례였다. 미국 내 항공편은 심사가 까다롭다고 소문이 나 있었는데 쾌활한 아저씨가 여권과 탑승권을 검사하고 있었다. 과도한 붙임성과 친절이라고 느껴질 만큼 밝은 직원이었다. 아버지를 챙겨야 하나 싶어 고개를 돌렸다. 재빠른 아버지가 먼저 그 양반을 상대하고 있었다. 다음은 내 순서. 아직 완벽하게 전환되지 않은 영어 모드였지만 직원들의 영어 질문은 가차 없었다.


“Hello, Mr. Kim. How’s the day(안녕하세요, 김 선생님. 오늘 기분 어떠세요)?”

‘오늘 어떻냐고요? 말 걸지 마쇼. 그냥 바로 들어가고 싶으니까.’


시니컬한 답변이 머리를 스쳤다. 학교에서 배웠던 대로 “아임 파인”을 큰 소리로 외쳐볼까 고민하다가 기왕 이렇게 된 거 영어 디엔에이를 자극할 겸 이야기를 좀 해보자 싶었다.


“Yeah, Thank you so much, sir. Everything’s fine. How is it goin’ as well(네, 고맙습니다. 다 좋아요. 당신은요)?”


맨해튼 할렘 가의 느낌처럼 발음도 약간 굴려보았다. 펑퍼짐한 아시아 남자의 입에서 제법 괜찮은 영어 문장이 흘러나오자 직원은 긴장이라도 한 걸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저 티켓에 동그라미 하나만 남기며 탑승을 허락해줄 뿐.


시애틀 국내선의 수속장은 별반 새로운 것이 없어 보였다. 인천 공항과 달리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음식점이라고는 달랑 패밀리 레스토랑 한 곳. 한국에서라면 기름진 음식쯤이야 쉽게 소화해낼 식성인데 위장도 시차 적응 중인지 썩 내키지가 않았다. 무얼 먹을까 고민하던 찰나, 아버지가 아무런 말도 없이 경보 걸음으로 전진했다. 당신이 알고 있는 일본식 음식점이 있다며 한 번 보고 온다는 게 아닌가. 약 5년 전 아버지가 어머니와 함께 시애틀을 여행한 적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별다른 걱정 없이 멀어져가는 아버지를 지켜보았다. 10여 분 뒤 아버지는 주먹밥, 삼각김밥 같은 음식을 양손 가득 들고 왔다. 마치 일식 집을 싹쓸이라도 한 듯했다. 대한민국 한 편의점에서 막 공수해온 것처럼 익숙한 음식이었다. 별것 아닌 것에서 마냥 반가운 마음이 샘솟았다.


그런데 이 소중한 음식을 펼쳐 먹을 만한 곳이 없었다. MBA 학위를 딴 두 사람과, 박사 학위를 딴 사람, 영재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모여 잔머리를 굴렸다. 결론은 커피숍을 찾자였다. 커피를 여러 잔 시킨 뒤 가장 큰 테이블을 점령해서 등 돌리고 밥을 먹자는 거였다. 결국 우리는 언제 다시 시애틀 공항의 이 커피숍에 오겠냐 하면서 안방처럼 편하게 식사했다. 현지인이 봤다면 꽤나 꼴불견이었겠지만 배고픈 우리를 막을 수 없었다. 애니메이션 <장화 신은 고양이>의 고양이 눈을 하고서 배고파 하는 아이들을 보니 매우 용감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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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은 공항에서 간단하게 때웠다. 이 마저도 진수성찬이다.




비행기를 타고 오븐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


비행기에 올랐다. 라스베이거스로 두 시간 하고도 10분 더 이동해야 했다. 서울-부산을 비행기로 50분 만에 가는데 두 시간이 걸린다니,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느낌이었다. 이동 거리도 약 1,400킬로미터. 미국 땅의 크기가 피부로 와닿았다. 하늘에 구름이 거의 없어서 비행기 창문 너머로 미국 땅이 한눈에 들어왔다. 만년설로 뒤덮인 레이니어 산봉우리가 보였고 황량한 서부 사막도 뚜렷하게 보였다. 시차에 적응하느라 힘들어하는 아들을 달래줄 방법이 없었다. 스마트폰에 있는 18개월짜리 딸 사진을 열었다. 싸울 일 밖에 없던 동생의 모습을 보더니 아들 녀석 표정은 더욱 어두 워졌다. 이윽고 아이 엄마 사진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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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보면 비슷해 보이기도 한데 미국은 grand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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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워낙 맑아서 비행기를 탄 것인지 우주선을 탄 것인지 헷갈린다.



“엉엉……, 엄마.”


아들 녀석은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대성통곡했 다. 승객들 시선이 우리 자리로 몰렸다. 아이에게 왜 우느냐고 물었다.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우는 거야?”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아이.

‘미안하다, 아들아. 그냥 이렇게 여행하자. 네 엄마는 한국 에라도 있잖니.’

나도 말없이 아이 등을 다독였다. 겨우 울음을 그친 아이는 쿨쿨 잠들었다. 도착지에 다 와갈 때쯤 잠드는 습관을 보니 내 핏줄이 맞는 듯했다.


잠시 뒤 비행기가 착륙했다. 착륙 서스펜션도 저가 항공기 답게 터프했다. 창밖으로 이글거리는 아지랑이가 보였다. 내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예전에 라스베이거스에서 느꼈던 열기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건조한 대기 덕분에 견딜 만했던가. 용기를 내어 밖으로 나갔다. 신음 소리 같은 탄식이 저절로 나왔다. 10년 전 느꼈던 건 더위가 아니었나 보다. 문득 기온이 궁금해져 스마트폰을 열어보니 책에서나 볼 수 있는 숫자, 41도가 찍 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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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베가스에 드디어 도착했다


라스베이거스에 왔음을 증명해주는 건 열기 말고도 또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보이는 화려한 슬롯머신 게임기. 이 화려한 기계가 잘 작동하는지 적극적으로 시험해보고 싶었으나 가족이 옆에 있어서 곧바로 렌터카를 찾으러 이동했다.


헤어드라이어에서 나오는 뜨거운 바람을 쉬지 않고 맞는 느낌이랄까. 렌터카 센터로 이동할 때 느낀 라스베이거스 날씨는 너무나 덥고 뜨거웠다. 바싹 마른 공기가 콧속으로 들어오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리가 빌린 7인승짜리 거대한 카라반에 모든 짐을 넣고 시내로 들어서니 정말로 라스베이거스에 왔다는 것이 느껴졌다. 화려한 라스베이거스 거리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생존을 위한 여행이 시작되었다


호텔에 짐을 내리며 든 생각.


‘배고프다.’


아이들도 배고프다며 아우성이었다. 시애틀 공항 커피숍에서 허겁지겁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왔으니 배고픈 게 당연했다. 우리가 예약한 ‘더 베네시안 호텔’은 화려하고 멋진 곳이었다. ‘초대형’, ‘최고급’이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호텔이었다.


“여행 경비를 초반에 다 써버리는 거 아니야?”


호텔을 예약했던 누나에게 물었다. 하지만 미국 팀은 그동안 꾸준히 여행을 다닌 덕분에 무료 티켓이 있었다. 또 초과된 금액은 포인트로 결제해서 한 푼도 내지 않고 라스베이거스의 최고급 호텔을 예약할 수 있었다. 그들이 지난 몇 년간 쌓아온 꿈을 우리 삼대가 허무하게 짓밟은 건 아닐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미국 팀도 우리 덕분에 이토록 화려한 호텔에 온 것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베네치안 호텔의 이태리의 한 성을 통째로 옮겨 놓은 듯한 인테리어에 놀랐다.


시애틀에서 저녁 다섯 시가 다 되어서 비행기를 탔더니 라스베이거스는 벌써 밤 여덟 시경. 식사를 어디서 해결해야 할지 의견이 갈렸다. ‘그냥 근처에 가서 고르지 뭐’라는 안이한 마음 때문이었는지 의견 일치가 되지 않았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거론되었고 햄버거 전문점, 베트남 식당, 호텔 뷔페 등 모든 음식점이 출동했지만 결국 한식당에 가기로 했다. 다행히 한식당은 3년 전 업무 출장 차 라스베이거스에 잠시 왔을 때 가본 곳이라 익숙한 척 가족들을 안내했다. 식당에 앉자마자 연륜과 노하우가 한가득인 아버지의 ‘노 룩’ 주문이 술술 나왔다.


“왼쪽 제일 위에 있는 고기 메뉴 4인분이랑 맥주 두 병, 소주 한 병 시켜봐라.”


꽃등심 4인분에 삼겹살을 추가하고 시원한 맥주까지 마시니 “아, 여행 왔구나. 즐겁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얘들아, 맛있어?”


먹느라 분주한 아이들은 엄지손가락을 척 치켜세웠다. 식사 시간에 항상 딴짓을 하거나 깨작거리며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아들 녀석도 정신없이 고기를 흡입하고 있었다. 맥주 한잔 걸친 아버지의 얼굴은 해석하기 어려운 미소로 가득했다. 분명 즐거운 표정이었지만 진한 아쉬움과 그리움이 어렸다. 이곳에 의자 한 개가 더 놓였다면, 그 의자에 엄마가 앉아 있었다면……. 어쨌거나 무사히 여행지에 도착했고 한국 음식까지 먹었더니 사막에서도 살아 돌아갈 체력을 다시 얻은 듯 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훌륭한 식사가 앞으로 더는 없을 것

이라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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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도 고프고, 음식도 품질이 훌륭한 덕에 미국 여행 중 가장 맛있는 식사였다


제아무리 라스베이거스라도 밤이 되면 더위가 가시리라 여겼는데 오해였다. 열 시가 다 된 시각임에도 여전히 덥고 뜨거운 헤어드라이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맥주와 고기 맛에 취한 채 온 가족이 함께 라스베이거스 밤거리를 배회하기로 했다. 사실 라스베이거스에서의 첫날 밤을 위해 따로 준비한 계획이 없었다. 난감했다. 어디를 가야할까, 모든 연령을 만족시킬 곳이 당최 떠오르지 않았다. 가이드를 자처한 내가 손들고 나섰다.


“엠앤엠 월드에 가자.”


엠앤엠 월드는 초대형 4층짜리 초콜릿 가게였다. 아버지께는 죄송했지만 아이들을 위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죄송은 무슨, 한잔 걸쭉하게 걸친 아버지가 더 적극적이었다. 형형색색 초콜릿을 손자들 셋과 함께 고르고 노래를 부르며 흥을 내던 아버지. 서울에 있는 막내 손녀 주라며 캐릭터가 그려진 옷까지 가장 먼저 결제했다.


“초콜릿이 이렇게나 많다니!”


아이들은 반 실성한 상태였다. 의외의 장소에서 모두에게 즐거움을 선사한 듯하여 자신감이 생겼다. 여행 오기 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왠지 이번 여행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것 같았다.



별 것 아닌 품목으로 이렇게 큰 의미를 담아 창의력을 발휘하는 것은 미국 사람들이 참 잘하는 skill이 아닌가 감탄스러웠다.


호텔로 돌아오니 시곗바늘은 밤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 다. 짐을 정리하고 씻고 옷을 갈아입자 아이들은 기절하듯 잠 들었다. 나도 피로를 견딜 수 없어 잠을 청하려는데 아버지가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아버지, 안 주무세요?”

“나갔다 올란다. 자라.”

“네? 어딜요. 이 밤에. 여기 미국이잖아요.”


아버지와 함께 따라 나섰어야 했으나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컨디션이었다. 영혼마저 침대에 붙어버린 느낌이었다. 결국 아버지 혼자 외출을 감행했다. 그날 아버지가 몇 시에 돌아왔는지 아직도 모른다. 호텔 게임 사업에 투자라도 하러 가신 건 아닐까 싶었지만, 아버지는 그냥 야경 사진을 찍고 왔다고 했다. 무사히 돌아왔으니 다행이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첫날 밤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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