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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생활, 정서적 위기가 찾아올 때

정신과를 문의하는 홍콩의 한국인들

오늘은 취업 이야기는 아니지만 세계 어디에서 살든 꼭 중요한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나의 정서를 지키는 일.


10월 28일 산업인력공단 강연에서 "홍콩 취업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 질문이 나왔다.

잘된 이력서, 면접 스킬? 이보다 더 해내기 어렵고 중요한 것, "나의 감정을 건강하게 지키는 것"이라고 답했다. 인생 전체에 중요할뿐 아니라 해외 취업, 그후 이어질 해외살이에 아주아주 중요한 요소다.

2021년 5월 26일 섹오 (Shek O) 해변, 개기월식을 기다리며 요가 명상을 하는 홍콩인들


특히 홍콩에서는 고용안정성이 매우 낮다. 홍콩에서 permanent (정규직)이라는 포지션은 의미가 거의 없는 것이, 회사가 원하는 실적 또는 퀄리티를 내지 않으면 언제든 해고가 가능하다.

해고 방식은 보통 이렇다. 해고 한두 달 전 '짜르겠다'고 통보를 하거나 두세 달 전 '한 달 이내에 퍼포먼스가 획기적으로 높아지지 않으면 그때 가서 얘기좀 하자'고 경고를 주는 식. 또는 출근했더니 당일에 내 자리가 없어지거나 회사가 정리해고를 하거나 아예 사업을 접는다며 하루아침에 통보하는 식. 따라서 홍콩에서는 해고, 이직이 아주 흔하기에 누가 해고당했다고 손가락질할 일이 전혀 없다. 최근 코로나, 중국 영향 때문에 구조조정이나 사업 종료가 늘어나고 있다. 나도 홍콩살이 3년간 20여 명의 지인들이 해고당하는 걸 봤다.


즉 홍콩 취업을 생각하는 분들은 고용 안정성이 매우 낮다는 걸 염두에 두셔야 한다.

분야를 막론하고 실적 압박이 있는 포지션일수록 더욱 그렇다.


카카오톡에 홍콩 교민들이 생활정보를 공유하는 회원수 1000~1500명의 단체채팅방이 서너개 있다. 좋은 정신과 연락처 알려달라거나, 원격상담도 좋으니 한국인 심리상담사 연락처 알려달라는 문의가 꽤 자주 올라온다. 2주 전에는 홍콩에 사는 40대 한국 여성이 집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뉴스도 있었다.


왜 그럴까? 이유를 추측해보면, 해외에서 느끼는 정신적 압박의 특수성이 있는 것 같다. 홍콩의 업무환경이 잘 맞는 사람도 있겠지만, 업무가 잘 안 풀릴 경우 외국인들과 영어로 소통하고 피드백받는 것이 굉장히 부담될 수 있다. 내 언어와 업무의 정확성을 일일이 지인들에게 봐달라고 할 수 없으니. 또 어느 정도 높은 포지션을 성취했을 때, 홍콩 사정을 잘 모르는 한국의 가족이나 지인들이 보내는 기대어린 시선도 부담일 수 있다. 영어로도 생활은 하지만, 광동어를 못하니 내가 정말 이 땅에 뿌리내려지지 않은, 붕 뜬채 살아가는 듯한 괴리감도 존재한다.


홍콩은 워낙 많은 외국인들이 3~5년 지내고 떠나는 곳이다 보니 내가 여행객들의 물결 속에 서 있는 기분도 든다. 홍콩에 있으면 주변국 즉 중국, 대만, 싱가폴, 태국, 말레이시아, 일본 등으로 이직할 기회도 많다. 그러한 '자유로움'은 '정착의 의무'를 덜어주지만, 내 인생이 장기적으로 어디에 뿌리내려야 하는지 고민할 시간도 줄인다. 그것이 가끔 굉장한 쓸쓸함으로 나 자신을 위축시킬 때가 있다.


나는 첫 구직기간, 그리고 딱 1년 전 마음이 굉장히 힘들었다. 1년 전엔 특히 홍콩의 주거환경과 업무의 난도가 내 정서를 크게 압박했고 한국에 있는 가족과도 자주 소통하지 않았었다. 우울의 정도를 말하자면, 뭐...서울에 잠시 있을 때 고속터미널 꽃시장에서 휘황찬란한 크리스마스 장식 상점들을 지나며 '예쁘다'고 생각하다가도 1초만에 '홍콩 집에 장식해봤자 어울리지도 않겠지'라며 울적해지거나, 홍콩으로 돌아가 춥디추운 호텔에서 격리하는 동안 1970년대스러운 벽지 무늬가 숨을 조이는 것 같다거나, 안부를 묻거나 간단한 질문을 하는 지인들의 카톡이 온 줄 알면서도 답하기가 막막해 메시지를 열지도 못한 것.


그래도 그 때 크게 후회되는 일은 없다. 구직기간에는 우울증은 없었는데 자존감이 많이 낮아져, 돌이켜보면 후회되는 행동들이 꽤 있다. 정서적으로 불안정하면 자기답지 않은 행동을 하기 쉽다. 평소에 지키던 예의나 소신을 거스른다거나, 나답지 않은 선택을 하거나, 타인의 태도에 굉장히 민감해하며 화를 내는 일이 잦아진다. 이렇게 정서가 약해지면 어떤 제안이나 '도움을 가장한' 손길이 왔을 때 판단력이 흐려지고 나중에 더 큰 상처가 생길 수 있다. 그 때 있는 곳이 국이 아니라 해외란 점은 나를 더 불안정하게 만들고 문제 해결을 더디게 할 수도 있다.


주변에 한 지인은 사회정의, 공정성, 인간다움, 진실함 등에 대한 단상으로 글을 써 인터넷에서 꽤 인기가 높은데 나를 포함해 주변인들에게 대하는 태도가 정말 무례해서 내 인내심도 바닥난 적이 있다. 알고보니 우울증이었다. 우리가 교류한 타이밍이 하필 그의 우울증 시기였다고 해도 더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나 역시 몇몇 사람들에겐 그런 인상을 주었을 수도. 아니 그것보단, 나답지 않았던 선택 몇 가지로 나를 더욱 아프게 만든 순간들이 씁쓸하다.


해외생활을 희망한다면 긍정적인 꿈만 꾸지 말고, 내가 정서적으로 취약해지는 순간이 올 수 있다는 것도 각오해야 한다. 그리고 정말, 지구 어디에서 살든, 나를 기쁘고 건강하게 만드는 방법들을 수집하고 키워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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