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통 글이 써지질 않았다. 주말부터 이어온 구부정한 나의 마음이 나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월/목" 2회 게시라는 내가 만든 Rules이 버겁게 느껴졌다. 감정의 정화가 부족해서였을까, 아니면 쓰고자 했던 글이 누군가를 저격한다고 느껴서였을까... 마음이 불편했다.
그동안 '살며 삭아가며' 콘텐츠는 당일 새벽에 글을 써도 술술 쓰였었다. 그런데 어제는 불편한 기분과 함께, 글감 후보로 정해놓은 수많은 주제들에 대해서 이 이야기도.. 저 이야기도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내 마음이 무슨 상태인지알지도 못한 채 글을 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이 주제, 저 주제 돌아가며 한참을 고민했지만, 시간이 흘러 출근할 시간이 다가왔다.
회사에 긴급회의가 잡혀오전 8시까지 출근을 해야 하는데, 대략 10분 정도 늦을 것 같아 부아가 치밀었다. 새벽부터 뭐 하나 해놓은 게 없다고 생각하니 월요일 오전 시작이 참 별로였다.
좀처럼 풀리지 않던 마음의 원인 찾기
보통 월, 목요일 출근길에는 지하철에서 당일 발행할 '브런치 글'을 최종적으로 읽어보거나내용을 보충하면서 오는데, 어제는 그럴 콘텐츠가 없으니 음악 프로그램(쇼미 11, Show Me The Money 11, 파이널 편)을 보면서 왔다. 사무실 도착까지 약 다섯 정거장 정도를 앞두고, 무엇인가에 홀린 듯 유튜브 앱을 켰다. 내 감정의 원인은 타인에 대한 분노라는 생각을 하며, "분노"라는 단어를 검색했다.
다양한 제목들의 유튜브가 펼쳐졌다. '분노는 시그널이다', '분노에 잡아먹히지 않는 법', '화가 나서 미치겠다면 이렇게 해보세요' 등등... 그중 하나를 클릭해서 '1.5배속'으로 머릿속에 이야기들을 넣어주다가 '관련 영상'에서 박상미 교수님의 "다 짜증 나고 다 꼴도 보기 싫을 때"라는 콘텐츠가 보였다. 0초의 망설임도 없이 클릭했다. (쇼츠 콘텐츠 중에 "자녀교육" 관련 짧은 이야기로, 내게 경종을 울려주신 분이기도 하다.)
박상미 교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갑자기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에 대한 미움의 마음을 가진 나를 '나 스스로' 미워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힘든 것이었다.
교수님이 알려주신 스스로를 미워하는 단계는 다음과 같았다.
1. 내가 밉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2. 나를 비난하고 욕한다. 3. 나를 용서할 수 없다. 4. 나를 처벌한다.
연민으로 연민하라
같은 사무실에서 친한 동료로 지내는 M에게는 대단한 점이 있었다. '누군가'를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분노할 때, M은'누군가'를 연민했었다. 나는 '누군가'의 문제점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주의였는데, 연민이라는 감정을 가질 수 있다니.. 존경스러웠다.
박상미 교수님의 짧은 강의가 흘러나왔다. 기업 강의 시마다 '우리 회사에는 돌 아이 같은 사람이 있어요'라는 말을 늘 듣곤 하는데, '화내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연민"의 감정으로 보면 그 사람은 이상한 게 아니라 "아픈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연민의 감정으로 이상한 사람을 바라보면 '웃을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고 했다.
순간 M이 '누군가'의 앞에서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아... 이거였구나, "연민"이었구나....' 머리를 두 번째 얻어맞는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를 연민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부터 연민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나를 사랑할 것인가, 미워할 것인가
나는 그런 존재였다. 무엇인가 잘못하거나 실수를 하면, '남탓'을 하는 게 아니라 '내탓'을 하는 편이었다. 남들에겐 관대하고 나에게는 막대하는... 그러다 보면 늘 칼 끝이 남이 아닌 나를 겨누고 있는 상태가 되어 있다.(도덕적으로 좋아 보일지 모르나, 실제로는 내가 나를 상처 입히는 날이 많아서 참 별로다.)
조울증에서 '울증'이 지속되는 시간 동안 친한 후배 K에게 몇 차례에 걸쳐 심리 상담을 받았을 때에도 나를 사랑하라는 이야기를 들었었지만 좀처럼 쉽게 되질 않았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진 후에도 나를 사랑하는 것은 개념적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익숙해지진 않았었다.
지금은 호주에 살고 있는 베프인 H가 아이들의 등교, 등원길에 해주는 자기 확언처럼 우리 아이들에게는 자기 사랑에 대해 조금씩 습관화를 만들어가고 있었지만, 정작 나는 나를 완전히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다. 알차게 지낸다는 요즘의 나를, 나는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내 기준이 너무나 높은 것은 아닐까?
박상미 교수님이 말씀해 주신 방법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오늘은 조금 더 나를 연민하도록 내게 이 말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