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주를 하더라도 술자리에 참여해야 하는 일은 생긴다. 회사 내 체육행사, 반기별로 진행하는 회식, 다른 부서와 업무 협의를 위한 저녁 자리 외에도 참 많은 술자리가 있다. 친한 지인들과의 모임 역시 '술자리'를 기본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단주 후에 각종 술자리에 참여해 보면서 느꼈던 이야기를 시간의 흐름대로 적어본다.
1단계. "제가 술을 안마셔요..."
단주 초기에는 술자리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건강상의 이유로 술을 끊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하고 나면 꼭 참여해야 하는 행사 외에는 빠지게 되었고, 각개전투로 일어나는 술자리에 대한 참여 요청도 많이 줄게 되었다. 필참해야 하는 회식 자리에서는 지루한 시간을 버티기가 힘들었는데, 눈앞에 쌓여가는 빈병들과 신난 사람들의 목소리와는 달리, 술 한잔 안 마시는(못 마시는) 나는 적응도 되지 않는 자리를 지키기보다는 한시라도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을 더 많이 했었다.
이렇게 '술자리가 지겨워졌다'라는 생각은 술자리와 나를 더 멀게 만들었고, 자리에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도 은연중에 그 생각이 전달 되게 되었다.예전에 참 신나서 떠들던 녀석이 목석처럼 멍한 표정으로 있는 것도 분위기를 깨기 일 수였다. 슬슬 자리를 옮기는 시간이 오면, 어떤 핑계라도 말하고는 "저, 이제 그만 가보겠습니다."라고 인사하고는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2단계. "분위기에 살짝 취합니다."
직장 내의 술자리야 그렇다 하더라도, 평소 좋아하던 지인들과 술자리에서도 도통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보니, '아, 이건 좀 아닌데'라는 생각이 커져만 갔다. 친구들과 속 이야기를 주고받고, 세상과각종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던 참 좋은 자리였는데 말이다. 술 없이 점심에 만나 밥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것도 그것만의 매력이 있지만, 술자리만이 가진 분위기와 매력은 늘 존재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대안 마련이 절실했다.
고민 끝에 술을 마시는 지인과 만날 때는 '3의 법칙'을 우선 적용하기로 했다. 3명이서 만나는 것, 지금은 회사에서 은퇴하신 선배님께서 알려주셨던 말인데, 3명이 만나야 대화가 끊어지지 않고 쭉 갈 수 있으며, 내가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두 명끼리는 찐 술을 따르고 마실 수 있어 분위기도 제법 무르익을 수 있다.
거기에다가 "술을 마시는 느낌"을 더하기 위해, 사이다나 콜라를 시켜 소주 잔을 채웠다. "짠~" 경쾌한 소리로 잔을 부딪히며, 그들이 술 마시는 속도에 맞춰 마시며 잔을 비웠다. 탄산이 센 음료수들은 입에 털어 넣으면 "캬~~"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웃고 떠들고 이야기 하다보면, "너 콜라 먹고 취한 것 같은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 맞어. 내가 이 분위기에 취해버렸나 보다. ㅎㅎㅎ"
그런데 탄산음료를 먹다 보면 과당이 꽤나 많이 들어 있어서, 배가 금방 불러온다. 안주를 먹을 수 없는 지경이 된다. 신기한 건 소주나 맥주를 마시는 지인들은, 쉴 새 없이 안주가 들어간다. 그렇다고 술을 먹기도 애매하고, 팔지 않는 탄산수를 가지고 와서 먹기도 애매한 상황이 오기도 했다.
3단계. "저 술 없이도 잘 놉니다~!"
극심한 "I형"이면서도, 술자리에서는 술의 힘을 빌려 "E형"을 불러내곤 했었다. 그래서 내가 술자리를 좋아했었나?.. 우선 내가 술자리 자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는, 술은 안마시지만 술자리를 겁낼 필요는 없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우선 술자리에 간다. 이미 내가 술을 안 마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분들께는, "저 술 없이도 잘 놉니다. 제가 술자리를 참 좋아하잖아요~"라고 답변을 드린다. 간혹 그 사실을 모르고 내 술잔을 채워주시려는 분들께는 "제가 사정이 있어서 술을 못 마십니다. 오늘은 물로 마실게요." 또는 "제가 이래저래 해서 술 끊은지 여섯 달이 지났습니다. 저 물만 마셔도 취해요."라고 상황에 맞춰 말씀을 드린다.
그리고 안주에 따라 '수종(주종 말고...)'을 정한다. 기름기가 많은 음식은 "펩시제로"를 마시고 (아이유 님, 삼촌이 늘 응원합니다.), 회를 먹을 때는 '단주 적응기 1탄'에서 이야기 한 "탄산수"나 "토닉워터"(당류가 있는 것도 있으니 제로류를 먹거나, 캐나다드라이 클럽소다를 추천한다.)를 마신다. 제품이 없어서 콜라나 사이다를 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많이 먹지는 않는다. 그리고 애매모호할 때는 물을 따라 먹는다. 이 중에서는 사실 물이 최고다. 몸에 일체의 부담감도 없으면서 대부분의 안주와 잘 어울린다.
술이 들어가면서 상대방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하면, 나도 슬슬 목소리 볼륨을 키운다. 박장대소와 맞장구도 많이 친다. (그런데 이건 내가 지독한 아싸면서도 "말" 하는 건 좋아하는 타입이라서 이렇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분위기에 취해서 진짜 술 취한 사람 처럼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나면, '드백이가 술을 안 마시고 있다'는 사실은 그닥 중요하지 않게 된다.
간혹, 술을 안마시기 때문에 술 취해서 이야기를 멀쩡한 사람에게 하는 것을 꺼려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술취한 사람보다 더욱더 별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를 보면 안심이 되시나 보다. (물론 술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는 그 자리를 일어남과 동시에 함구를 하는 건 기본이다. 술을 끊기 전에도, '술자리'에서 나온 개인적인 이야기를 퍼트리는 사람과는 술 마시기가 꺼려진 것이 사실이니깐 말이다.)
단주를 하면서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것은, 내가 저질 체력이라 술 마시면 수명이 다한 배터리처럼 깜빡이며 기억도 못 하고 지쳐 쓰러지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멀쩡하게 집에 온 적이 별로 없...) 술을 안 마시면서 그 자리에 적응을 해보니, 그 좋아하는 술자리를 더욱더 오래 끊김 없이 즐길 수 있었다.
함께 술을 마시는 사람들도, 집에서 걱정하는 가족들도 모두 만족하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 집에 늦게 들어가더라도 정신이 멀쩡하니 그날 꼭 해야 할 일들을 미루지 않게 되고, 다음날 역시 숙취가 없어 하루의 시작도 온전히 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