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kmo Feb 16. 2022

난 왜 공부를 잘하지 못했나?

정말 공부를 잘하고 싶었다.

오늘의 글은 왜 내가 그동안 공부를 못했나에 대한 성찰의 시간과 변명을 쭉 늘어놓는 기회가 될 듯싶다. 워낙에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는 굉장히 상대적이고 또한 유전적인(genetic) 요인과 후생적인(epigenetic) 상황들에 의해 달라지겠지만, 여전히 내 의지가 약했던 이유가 가장 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든다. 세상엔 너무 재밌고 신기하고 내 관심을 가져가서 주물러 터트릴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아 내 집중력을 홀딱 빼앗겼다고 말하면 너무 무책임하게 들리겠지만 그때는 그랬다. 


영화음악 평론가가 되겠다면서 (당연히 서울대 의대나 법대를 들어갈 실력이 아니어서 이겠지만!) 용돈을 받으면 바로 "스크린"과 "로드쇼"에 구입하기 위해 서점으로 향했다. 마치 할리우드 스타처럼 잡지를 넘기며 영화배우 사진들을 보며 같이 일하는 동료나 친구처럼 여겼던 때가 있었다. 데이비드 핫셀호프, 브룩쉴즈, 페트릭 스웨이지, 데미무어, 커트 러셀, 피비 케이츠, 소피 마르소, 샤를로트 갱스부르 등등... 그들을 만나러 샌프란시스코 배이 에어리어에 방문하기도 하고 L.A. 비버리힐스에도 갔다가 프랑스로 향했던 그런 상상을 펼쳤던 시간들이었다. 당연히, 영화음악 OST를 들어야 한다며 LP를 사모았던 이야기는 비밀로 하겠다. (Don't tell Mama!)


나만의 해피월드였던 그시절 매거진들 (출처: 네이버)


왜 공부 이야기로 이 글을 시작했냐면, 나에겐 엄청나게 극복하기 힘든 열등감이 자리 잡고 있어서다. 그리고, 그 열등감이 내 학구열에 방해가 되었다는 생각이 미치자. 열등감을 자신감으로 탈바꿈시키고 싶어서 부단히도 애썼던 젊은 시절을 생각하면 "정말 쓸데없는 짓을 많이 했구나."라고 생각될 만큼 다양한 시도를 해봤던 것 같다. 배짱과 체력을 키우기 위해 일용직 근무를 했다가 요령 없이 힘으로만 했던 삽질 때문에 손에는 핏물집을, 허리에는 근육통을 달고 돌아와 일주일 동안 파스와 동거를 했던 일이며, 호텔 뉴월드에 저녁 타임 웨이터로 취직하여 새벽까지 곰탕을 날랐던 경험과 현대 백화점 건너편에 있던 소주방의 웨이터가 되어 새벽 알바의 대마왕이 되었던 일까지. 하지만, 그 열등감의 뿌리는 찾을 길이 없었고, 자꾸만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의지하고 싶고,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구만 커질 뿐. 내 자신감은 어디에 숨어 있는지 좀처럼 찾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자신감 찾기 프로젝트는 거의 이십 대의 마지막까지 계속되었다.


난 왜 남한테 인정을 받으려고 이렇게 노력을 하는 거지?


열심히 회사를 다니며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살고 있던 어느 날 때 문득, "난 왜 남한테 인정을 받으려고 이렇게 노력을 하는 거지?"라는 의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인정과 사랑을 남으로부터 구걸하고 다닌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았다. 그런 이유에서 나의 건강이며 나의 처지를 생각지도 못하고 누군가 내게 부탁하면 다 도와주고 돌아다니고, 회사일은 회사일대로 "인정"을 구걸하며 영혼을 갈아 넣는 삶을 살며 겨우 버티고 있었던 것 같다. 단지, 관심을 밖이 아닌 내 안으로 돌리면 되었던 것을 그게 그렇게 힘들었나 보다. 그도 그럴 것이 어렸을 때부터 엄마는 매일 누구네 아들은 전교 몇 등이네 하며 나와 비교하기를 공영방송 앵커처럼 매일 밤마다 떠들기 일쑤였고, 그런 일들이 쌓여서 그랬는지 나의 반항심은 엄청났던 것 같다. 열등감은 이렇게 어린 시절 동안 키워져 왔고, 덕분에 점점 공부는 내게서 요단강만큼이나 멀게만 느껴졌다. 당연히 스트레스는 점점 커지면서 해피월드에 대한 나의 집착은 더 커지게 된다.


해피월드는 부모를 멀리하기 위한 나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내가 살려면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참여한 인도 집단 상담. 내가 모아놓은 용돈을 모두 털어서 참여했다. 세상에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고,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곳들이 있었다. 경험하지 않았으면 알 수도 없었던 일들, 장소들, 감정들. 모두들 자신만의 행복을 찾기 위해 수많은 고통을 견디며 살아왔던 이야기들을 나눈다. "젠장, 나만 힘든 게 아니었어." 서로 힘든 모습을 솔직히 표현하고, 힘든 원인을 다 같이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줬고, 그 지지와 함께 자신의 힘으로 그 원인을 깨닫는 순간, 멍해지고 허무하고 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이틀 동안의 몸살. 나약한 아버지가 나에게 남겨준 감정 찌꺼기들 의.존.감, 원.망., 무.기.력., 열.등.감.


열등감의 원인을 알았으니 이제 나약한 아버지는 내 품에서 보내줘야 할 때가 되었다. 부디 좋은 세상에서 귀하게 태어날 수 있기를. 인도에서 돌아온 후, 새로운 시작을 위해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인생 마지막 기회라 여기며 영국으로 늦었지만 1년 어학연수를 떠났다. 영어, 끝을 보리라는 다짐과 함께 배수의 진을 치고 시작했다. 덕분에 석박사 통합 과정 입학이 가능할 만한 성적을 받았지만, 외국인이 내야 하는 학비가 정말 말도 안 되게 비쌌다. 다시 한국으로 후퇴. 일단 회사를 다니다가 다음 기회를 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연구소에 취직을 하게 되고, 이미지 프로세싱 플랫폼을 구현하다 보니 우연히 커리어에 맞는 잡 오퍼를 드레스덴에서 받게 되고 현재까지 여기에 머무르고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 "추운 계절이 되고서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듯, 세상이 흐려진 뒤에 비로소 맑은 사람이 드러난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쩌면 맑은 사람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어려운 시기에 도래했을 때 빛을 발한다는 뜻으로 해석해본다. 내가 공부를 못했던 이유는 어쩌면 내 안에 무수한 찌꺼기들이 너무 많아 나의 집중을 방해한것은 아녔을까? 그래서, 시기, 질투, 부러움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에 짓눌려 나의 마음을 솔직히 들여다볼 수가 없어 그토록 힘에 겨워했던 것은 아녔을까? 모두들 힘들다. 힘든 만큼 자기만의 최적의 현명한 방식을 가지고 있다. 난 그 다양한 방식들을 언제나 지지하고 응원한다. 



작가의 이전글 어떤 이유에서 글을 써야 하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