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유수집가 Oct 23. 2020

3대가 덕을 쌓아 얻은 주말부부

밤 10시를 막 넘긴 시각, 전화벨이 울렸다. 남편이었다. 저녁때 회식을 한다고 카톡이 왔으니 술에 취해서 하는 전화이리라. 하이디가 잠자리에 들었다면 편히 받았을 텐데. 아직 씻지도 않고 있다. 얼마 전 학교에서 음주&흡연 예방 교육을 받고 온 뒤로 술은 반 잔까지만 마셔야 한다고 당부하는 하이디이기에 일단 하이디에게서 떨어져 전화를 받았다.


"오늘 왜 회식했는지 알아?"


최근 몇 달간 그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문제 때문에 회식을 한다는 카톡 메시지를 받았기에 답했다.


"왜? 해결 안 돼 답답해서? 아님 또 다른 문제가 생긴 거야?"


축 처질 것이라 예상했던 그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완전한 해결은 아니지만 일부 해결이 됐다고. 그 문제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상황을 다 알고 있던 터라 내 목소리도 함께 들떴다. 눈치 없이 너무 들뜬 엄마의 목소리 때문에 결국 전화기는 하이디 손에 넘어갔고 살짝 혀가 짧아진 그의 목소리에 하이디는 아빠가 취했노라 속상해하며 통화는 강제 종료됐다. 이런 날은 당연히 취해도 된다고 말할 수는 없어 이건 취한 게 아니라는 말로 하이디를 설득했지만 통하지는 않았다.


주말부부 6개월 차. 서울에서 함께 살 때보다 그의 일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다. 서울에서는 나도 힘들고, 그도 힘들기에 서로 힘든 일을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일과 육아가 얽혀 자칫하다 "너만 힘든 거 아니다. 나도 힘들다.', '너보다 내가 더 힘들다.'며 측정할 수 없는 무게를 놓고 말다툼이 됐기에 말을 아꼈다.


영상통화로 유튜브 찍는 아빠, 꽈배기 먹방 도전!

지금은 그가 회식이 없는 날에는 저녁 8시에 꼬박꼬박 영상통화를 한다. 이때는 하이디와 그만의 시간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서로의 일상을 나눈다. 피곤해서 널브러진 아빠와 그 앞에서 하이디 혼자 책을 보던 서울에서보다도 더 밀도 있는 대화가 오간다. 최근에는 영상통화 중 하이디만을 위한 아빠의 유튜브 생중계도 시작됐다. 아이스크림 먹기 먹방, 새로 산 침낭 언박싱 등 하이디는 아빠의 과한 몸짓과 재미난 설명에 깔깔 웃으며 좋아요 100개와 구독을 외친다.


하이디가 잠든 밤은 엄마와 아빠의 시간. 매일 전화 통화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면 미루지 않고 통화를 한다. 며칠 전에도 하이디가 아빠와 영상통화를 하며 불쑥 건넨 친구에 대한 속상한 마음 때문에 밤에 다시 통화를 했다.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하이디는 어떤 반응을 보였고 나는 어떻게 그 마음을 달랬는지를 남편에게 전했고, 남편은 이러면 더 좋겠다는 의견을 보탰다.


등굣길 하이디

낮에 카톡도 훨씬 자주 한다. 바빠서 '응', '아니' 정도의 짧은 대답만 할 수 있었던 서울에서 나와는 달리 지금은 충분히 답할 시간이 있기에 더 솔직한 마음의 이야기가 오간다. 오늘 아침에도 하이디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왔다며 학교로 들어가는 하이디의 뒷모습 사진을 보내니 남편에게 답이 온다.


'우리 딸 전학 가서도 학교생활 잘하니 참 대견하다. 어찌 보면 싫을 수도 있는데 말이야.'

...(중략)...

'이 시기에 내가 하이디 옆에 있기로 한 선택은 너무 잘한 것 같아.'

'그래 우린 좋은 선택을 했고, 잘하고 있어.'


이것만으로도 부족한 남편과 나는 열흘마다 한 번씩 만나는 날에는 함께 술을 마신다. 하이디의 눈치를 보며 막걸리 한 병을 나눠마시거나 맥주 333ml 캔을 하나씩 마신다. 이게 반 잔이라며. 이날은 하이디에게 유튜브 자유를 허락하는 날. 하이디가 유튜브에 홀딱 빠진 틈을 타 맥주 캔을 새것으로 바꾸고 빈 잔을 얼른 채우며 남은 이야기를 나눈다. 제주에서 마음이 넉넉해진 나는 남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그건 이렇게 하지, 그건 아니지의 날카로운 조언보단 잘하고 있다고 격려하고 응원하며 그에게 힘을 주고자 한다.


처음부터 주말부부의 삶이 이렇게 평온했던 것은 아니다.  한 달은 참 많이 싸웠다. 전화로 이렇게 싸울 수도 있다니 놀라웠다. 남편이 걱정할까 봐 이야기하지 않은 일들이 실마리가 됐고, 남편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다 '내가 너를 배려했는데 너는 왜'로 시작된 다툼은 결국 내 눈물로 끝났다. 게다가 처음에는 나 혼자만 근사한 제주에 있다며 남편에게 갖는 미안한 마음이 커서 남편의 작은 잔소리도 꼬아 들어 또 싸움이 됐다. 전화만 길어지면 싸움이 돼서 전화하지 않기도 했다. 막상 만나면 왜 그랬을까 미안해했고.


자전거 캠핑을 즐기는 남편

시간이 흐르며 우리도 우리만의 방법을 찾았다. 배려는 적당히, 미안함 대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각자의 자리에서 즐겁게 살다 만나기. 남편은 이주에 한 번씩 금요일에 휴가를 내고 목요일 밤에 제주를 온다. 제주에 오지 않는 주말에는 취미인 자전거를 타고. 얼마 전부터는 자전거 캠핑도 시작했다. 나는 하이디가 학교에 가는 시간 동안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좋아하는 글을 쓰고 책을 읽거나, 오름에 오르고 올레길을 걷는다. 각자 즐겁게 살기. 남편이 제주에 온 주말에도 남편에게 하루는 혼자만의 시간을 허락한다. 내가 좋았던 제주를 그도 그가 좋아하는 자전거를 타며 만끽하라고. 따로도 즐겁고 같이도 즐거운 삶을 살며 우리는 편안해졌다. 싸우지 않는다. 서로를 넉넉하게 품을 수 있게 됐다. 아등바등 헉헉거리며 전쟁처럼 보냈던 시간은 사라졌다.


집안일에 서툰 내가 서툶을 매일 들키지 않을 수 있음도 좋다. 특히 내 요리는 니 맛도 내 맛도 안 나는 것으로 유명한데, 남편에게 매일 요리 평을 듣지 않아도 되는 것은 다행이다. 하이디는 내 모든 요리가 맛있다고 해주니 이 메뉴 저 메뉴 도전해보고 성공적인 요리를 남편이 온 주말에 해 보인다. 정말 내 요리가 제 맛을 찾아가는 것인지 남편은 제주에서 하는 요리에는 늘 칭찬이다. 그래서 나도 기분이 좋고. 남편이 올 때마다 무슨 요를 해 보일까 설레며 메뉴를 구상한다.


내가 반한 그, 그와 나의 딸

그의 매력도 더 자주 발견한다. 혼자서 자전거 캠핑을 즐기는 그의 건강한 취미가 그를 더 근사하게 만들고, 하이디를 위해 아낌없이 몸을 내던지며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그의 유쾌함이 사랑스럽다. 하이디의 단골 병원에 함께 가서 넉살 있게 말을 건네며 나와 하이디를 신경 써달라 부탁하는 그의 말솜씨에 다시 한번 감탄한다. 적당한 우리의 간격 덕분에 나는 그에게 또다시 반하고 있다. 제주로 이사할 때 많은 사람이 걱정했다. 주말부부가 괜찮겠냐고. 3대가 덕을 쌓아야 주말부부를 한다고 했던가. 아직은 우리 앞 3대가 덕을 쌓은 것이 맞나 보다. 주말부부 라이프는 현재 순항 중이다.




 

이전 11화 어느 근사한 가을 하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