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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유수집가 Oct 05. 2020

바이올린 선율보다 더 귀한 선율

"엄마, 산책 가자!"


하교 후 간식을 먹던 하이디가 말했다. 오늘은 놀이터에 나가지 않을 거냐 물으니 산책이 더 하고 싶단다.


"나팔꽃 확인해보려고."


등굣길 돌담에 핀 나팔꽃을 보고 알려줬다. 오후에는 잎을 오므릴 거라고. 그 말을 확인해보고 싶다는 거였다. 나와 하이디는 돌담 앞에 쪼그려 앉아 나팔꽃을 찾았다. 활짝 핀 아침에는 두 눈을 단번에 사로잡더니 입을 모 오후에는 들여다봐야 보인다.


"나팔~꽃 나팔~꽃 아침에 피는 꽃 오후에는 뭘 먹나 잎을 다물었네."


노래를 부르는 하이디. 그건 '무궁화 꽃' 노래가 아니냐고 타박했지만, 맑은 목소리 고왔고 오므렸다 펴지는 입이 귀여웠고 주저하며 만들어내는 가사에 감탄했다.


"뭘 먹은 건데?"


아침에 해가 뜰 때 그 빛을 먹고 오후 내내 입안에 담고 있다가 깜깜한 밤에 무섭지 않으려고 꺼내 보는 거란다. 멋진 생각이라고 맞장구를 쳐주니 하나 더 이야기를 꺼낸다. 아침에 등교하는 아이들의 엔도르핀을 먹는 거라고. 이 길은 등교 시간에 아이들이 제일 많이 보이니 아침에 잎을 활짝 벌려야 한단다.


"왜 하필 엔도르핀이야?"

"아이들이 꽃을 제일 예뻐하잖아. 이런 돌 사이에 피려면 나팔꽃한테 아이들 에너지가 필요하지."

"너 같은?"

"응, 나 같은!"


제주도에 와서 나와 하이디는 이런 대화를 자주 나눈다. 귤은 왜 초록색에서 노란색으로 변해가는지, 구름 위에 올라가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담쟁이덩굴이 칭칭 감긴 전봇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귤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 노란색으로 화장을 하기도 했다가, 검은색 돌하르방이 눈에 제일 잘 띄는 색이 되라고 명령해서 노란색이 되기도 했다가, 사람들 몸에 들어갔다가 그대로 빠져나오려고 오줌과 같은 색이 된 것이기도 했다. 엉뚱한 생각 릴레이. 이 릴레이의 결승점은 언제나 파안대소다.


제주도로 이사 오기 직전 1년 동안 나는 이런 엄마가 아니었다. 아이와 함께 산책하고, 아이의 엉뚱한 생각에 한참 동안 장단을 맞춰주고, 함께 웃고 웃고 또 웃는 엄마가 되지 못했다. 시간을 쪼개 쓰지 못해 동동거리고, 숙제 챙기기에 급급하고, 지적하기 바쁜 엄마였다. 바이올린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다.


하이디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며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1인 1악기 수업을 위한 선택이었다. 5월, 학부모 참여수업 시간. 악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바짝 긴장한 다른 아이들과 달리 하이디는 이리저리 몸통을 움직이며 여기저기 시선을 보내며 팔랑팔랑 웃음을 날리며 연주를 했다. 모두가 진지한데 저 혼자 톡 튀어나와 즐거운 하이디. 산만한 모습이 민망해 오그라 들었다.


엄마가 본 하이디와 선생님이 본 하이디는 달랐다. 절대음감에 박자감도 좋고 음도 잘 외우고 악보도 잘 보고 연주 스킬도 빨리 익힌다며 음악을 제대로 시켜보길 권하셨다. 학교 수업은 앞서가는 아이까지 살피기는 한계가 있으니 개인 레슨을 받으면 좋겠다고도 하셨다. 어리둥절했지만 깊이 마음에 담지 않았다. 엄마 듣기 좋으라고 작은 재능을 크게 말씀하신 것이리라 생각했다.


1년이 지난 2학년 5월, 학부모 참여수업. 선생님은 다시 한번 말씀하셨다. 하이디가 음악에 재능이 있다며 제대로 시켜보면 좋을 것 같다고. 작년 선생님의 권유 이후 하이디는 대학원생에게 개인 레슨을 받고 있었다. 대체 제대로 시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나의 의문에 선생님께서는 따로 한번 찾아오라고 하셨다.


"어머니, 하이디는 음악으로 진로를 고민해봐도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지금까지 가르쳐 본 아이 중 제일 빛나요. 보통 재능이 아니에요."


'제일'이라는 말을 무시할 수 있는 엄마가 얼마나 될까. 당장 다른 선생님을 알아봤다.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예중생, 예고생, 대학생을 가르치는 소위 큰 선생님이라고 하는 분들이었다. 대학원생 레슨 선생님보다 두 배로 레슨비를 더 들여 큰 선생님과의 레슨이 시작됐다.


"오늘 연습 다 했어?"

"연습 노트 어딨어? 제대로 표시한 것 맞아? 대충대충 한 거 아니지?"

"선생님이 고치라고 한 것 제대로 지켜가며 했어?"


대학원생 선생님과 레슨 할 때는 연습 숙제가 있어도 챙기지 않았다. 학교 숙제도 겨우 해가는데 바이올린 숙제까지 챙기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출근길에 오늘 숙제를 다 해야 한다고 다짐을 받고, 일찍 퇴근하는 날에는 바이올린 숙제부터 확인했다. 숙제를 끝내지 못한 날에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바이올린 연습부터 시켰다. '하루 정도 쉬어도 되겠지 하다간 그 하루에 손이 굳는다'라는 이야기가 나를 매일 연습 전쟁으로 밀어 넣었다. 숙제를 끝냈다고 하더라도 충실도가 못 미더워 확인하겠다는 명목으로 내 눈앞에서 몇 번 더 연습하게 했다. 야근하는 날에는 남편에게 확인 영상을 찍어 보내게 했다.


토요일 오전은 바이올린 연습시간. 일요일에 레슨이 있기에 토요일에 주어진 숙제를 마치지 못하면 하이디는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급기야 여행을 갈 때도 바이올린을 챙겨갔다. 다른 집 아이들을 보면 잘해야겠다는 욕심을 갖고 열심히 연습하던데, 연습하기 싫다고 하는 날이 있어도 금세 다시 마음 잡고 열심히 하던데, 매일 몇 시간씩 꾸준히 하던데. 제일 하면 안 되는 다른 아이와 하이디를 비교하기도 했다. 오늘이 행복한 아이로 키우고 싶다는 바람은 어디로 내던지고 아이의 미래만 붙들었다. 바이올리니스트는 어느새 내 꿈이 됐고, 하이디는 그 꿈과 점점 멀어졌다.


포기가 안 됐다. 아이의 재능이 아까워서. 연습은 싫지만 레슨은 좋고, 오케스트라는 하고 싶다는 하이디의 약한 마음을 붙잡고 연습 전쟁을 이어갔다. 연습도 재능이라지만 아직 어리니 연습을 싫어하는 것 당연하다며 더 독한 엄마가 되려 했다. 하이디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제주도로 이사를 결심하며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나의 커리어를 내려놓는 것이 아니었다. 바이올린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었다. 여덟 살에 바이올린을 처음 접한 하이디에게 늦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요즘은 워낙 일찍 악기를 시작하니까. 그래서 마음이 급했다. 고작 열 살. 더 늦게 시작하면 어떠랴. 자신이 원할 때 시작하면 더 무섭게 성장할 수 있겠지. 끝내 바이올린이 삶이 되지 않으면 어떠랴. 음악으로 즐거우면 되는 거지. 미래에 붙들려 나도 하이디도 불행한 연습 전쟁에서 빠져나오기로 했다. 행복한 오늘을 살기로 한 거다.


하이디가 바이올린과 멀어지지만 않도록 하자는 결심을 하고 제주도로 왔다. 학교에서 앙상블 활동을 하고 여전히 개인 레슨도 받는다. 하지만 이제는 어떻게 하면 하이디가 더 오래 바이올린 연습을 하도록 할까의 고민은 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더 즐겁게 놀 수 있을까를 먼저 고민한다. 신나게 놀고 학교 숙제도 다 하고 남은 시간에 바이올린 연습을 한다. 연습을 바라보는 내 자리도 바뀌었다. 서울에서는 잘못된 자세를 바로잡아야 했기에 연습 내내 하이디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하지만 지금은 하이디를 쳐다보지 않는다. 연주 소리를 배경음 삼아 나는 내 일을 한다. 자세를 고쳐야 한다면 스스로 해내기를 기다린다. 하기 싫은 연습이 아니라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연습으로, 매일 하는 꾸준함만 잃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나팔~꽃 나팔~꽃 아침에 피는 꽃 오후에는 뭘 먹나 잎을 다물었네.

 나팔~꽃 나팔~꽃 날 좋아하는 꽃 엔도르핀 먹고파 날 기다리는 꽃."


'아이들이 좋아하는 꽃', '등굣길 꽃', '나 같은 꽃'. 몇 번의 수정 끝에 2절이 완성됐다. 노래 가사를 만들며 터진 하이디의 웃음보. 웃음소리가 앞서 가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엉망진창 노래여도 괜찮다. 말이 되지 않는 가사여도 괜찮다. 하이디는 지금 세상에서 제일 귀한 선율을 연주하고 있으니까. 높은 가을 하늘을 가득 채우는 웃음소리. 깔깔깔 소리에서 빛을 본다. 이제 나는 바이올린 선율보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더 귀한 선율임을  알고 있다. 쓰러질 듯 온몸으로 웃는 하이디를 보며 나도 싱긋 웃는다. 그래, 이게 바로 내가 바라던 오늘이다. 나는 이제 오늘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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