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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유수집가 Sep 23. 2020

더는 배달의 민족이 아닙니다.

'***님이 선물과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제주도로 이사를 온 지 채 1주일도 지나지 않아 맞은 하이디의 생일. 서울 사는 친구가 유명 프랜차이즈 치킨 기프티콘을 선물했다. 보자마자 신난 하이디. 이모가 자신의 취향을 저격했다며 방방 뛴다. 원격 수업을 끝내고 먹을 거란다. 그래, 점심은 치킨이다.


기프티콘을 사용하기 위해 프랜차이즈 앱에 접속했다. 점심부터 배달이 될까. 하지만 시간이 문제가 아니었다. 집 주소가 문제였다. 배달 주소 입력 단계에서 맞닥뜨린 글자. '배송 불가 지역'이었다. 생각해보지 못했던 사실이다. 그래, 우리 집은 '중산간로'에 있지. 말 그대로 산 중간. 바닷가에서부터 오토바이를 타고 오르막을 한참 올라 중산간까지 배달 오기는 쉽지 않을 거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배달 라이더에게 배달료를 2배, 3배 준다고 해도 우리 집은 배달이 오지 않는 지역이라고 했다.


이미 치킨을 먹겠다고 방방 뛰었는데 포기가 될까. 오늘 꼭 먹어야 한다고 하이디는 두 눈에서 레이저를 뿜는다. "내 생일이잖아. 내가 원하는 걸 먹어야지." 니 생일이지만 내가 고생해서 낳았노라. 엄마는 치킨을 먹지 않아도 괜찮노라 말하고 싶지만 참는다. 이사 와서 맞는 첫 생일. 등교 개학 전이라 제주도에는 친구도 없는데, 아빠도 서울에 있어 함께 보내지 못하는데 선물 받은 음식이라도 먹게 해줘야지 싶었다.


사실 별로 어렵지도 않은 일이다. 내가 운전만 한다면. 차로 15분을 달려 매장에 찾아가 휘리릭 치킨을 받아오면 될 일이다. 하지만 당시는 운전면허도 없던 시절. 우리는 버스를 타고 함덕으로 나갔다. 치킨 하나 때문에 나가는 거라고 하면 조금 우스우니 생일 외출로 이름을 붙였다. 책방에 들러 책도 사고 치킨도 찾아 돌아오는 것으로. 버스를 타고 갔으나 버스를 타고 올 수는 없었다. 버스에 진한 치킨 냄새를 남길 수는 없으니까. 매장에서 먹고 갈까도 었지만 치킨은 집에서 먹는 거라는 하이디의 말에 포장을 택했다. 책과 치킨만 들고 가벼운 몸으로 택시를 타려니 아까웠다. 조금 더 욕심을 내서 장보기까지. 이제는 너무 무거워 후들후들 떨리는 팔로 택시를 탔다. 어렵게 찾아와 더 맛있는 치킨. 인증샷을 찍어 친구에게 보냈다. 환한 하이디의 표정보다는 미처 숨기지 못한 나의 피곤함을 본 친구가 말한다. "요리도 싫어하면서 배달 없이 어찌 사냐...."


지금도 치킨을 먹으려면 버스를 타고 가서 가져오냐고? 아니다. 이 에피소드를 들은 동네 분이 알려주신 희소식. 동네 치킨집 딱 한 곳이 우리 집에도 배달을 해준다는 것이다. 물론 족발도 피자도 떡볶이도 배달해 먹을 수는 없지만 배달 음식의 대표주자, 치킨이라도 되는 것이 어딘가.


사실 식사만 배달이 안 되는 것이 아니다. 식사 준비가 쉬워지도록 돕는 반찬, 간편식, 반조리 식품도 배송이 안 된다. 서울에서는 새벽배송업체의 VIP 고객이었다. 한 주에 두 번은 이용했다. 현관문 앞에 놓여 있는 배송 박스에는 반찬, 간편식, 반조리 식품이 가득 차 있었다. 채소나 과일이 섞이기도 했지만 메인은 아니었다.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것이 요리이기에 당연했다. 멀티태스킹도 안 되고 손도 느리고 게다가 레시피대로 정확하게 계량해도 니 맛도 내 맛도 아니 결과물은 나를 요리에서 멀어지게 했다. 시간은 오래, 정성은 듬뿍, 땀은 뻘뻘, 과정은 복잡. 그럼 결과물이라도 좋아야 할 텐데 그것도 아니기에 효율이 엄청 낮은 과제. 요리에 매달려 실력을 키우기에는 마음도 시간도  의지도 없었다. 그저 대체할 수 있는 것들이 많으니 다행이었다. 요리하지 않아도 괜찮은 서울의 삶이었다.


요리를 대체하는 것들이 사라져 버린 삶. 어쩔 수 없이 요리를 해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요리하겠다는 마음도 시간도 의지도 없었던 서울과는 달리 여기서는 시간이 있다는 것. 천천히 하나씩 새로운 메뉴에 도전해보고 있다. 식사 시간에 닥쳐 '오늘 뭐 해 먹지?' 고민을 시작하면 밥 먹기까지 너무 오래 걸리는 요리 초짜이기에 장보기 전 미리 메뉴 리스트를 정해둔다. 식단표를 세운 적도 있었지만 날씨에 따라 기분에 따라 먹고 싶은 메뉴도 달라지기에 메뉴 목록만 정해두는 것으로 작전을 변경했다. 지난 일요일에는 소고기 뭇국, 어묵 뭇국, 콩나물 어묵볶음, 콩나물 잡채 등 메뉴를 정하고 이에 맞춰 장을 봤다. 메뉴를 정할 때 제일 중요한 기준은 조리법이 쉬울 것. 여기에 재료를 남겨서 버리는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도 한다. 한 재료에 두 가지 요리를 해보는 것으로.


국 하나에 반찬 한두 개 정도의 단출한 식탁을 차리면서도 여전히 시간은 오래 걸리고 맛도 썩 좋지는 않다. 싱거워도 밍밍해도 뭔가 모르게 부족해도 늘 맛있다고 해주는 하이디. 엄마가 해주는 것은 무조건 맛있다는 하이디 덕분에 요리에 대한 마음과 의지도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그리고 매번 예쁜 접시에 담아 음식을 차리고 인증샷도 찍어둔다. 요리 실력 향상기를 남겨 보겠다는 마음으로. 요리에 좀 더 애착을 가져보자는 바람을 담아.


배달과 배송에서 벗어나 직접 요리를 하다 보니 몸은 귀찮아졌지만 자연은 더 편해졌다. 쓰레기 배출량이 확연히 줄어든 것. 포장 쓰레기가 차지하는 자리가 이렇게 큰 줄 몰랐다. 일주일이면 넘치던 분리수거함이 일주일이 지나도 헐렁했다. 배달 음식이나 간편식 등은 우리 가족 양에 맞춰진 것이 아니기에 남기는 양 많았는데 직접 요리를 할 때는 먹을 만큼만 할 수 있으니 남기는 양도 버리는 양도 줄었다. 쓰레기를 줄이니 쓰레기가 보였다. 서울에서는 품목 구분만 할 뿐 대충 버리던 분리수거도 이제는 정확하게 한다. 남은 내용물은 비우고 깨끗하게 헹구고, 라벨 등 다른 재질은 제거해서 버리고 있다.


한번 쓰레기를 줄이고 나니 더 줄이고 싶어 졌다. 아크릴 수세미 대신 천연 수세미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플라스틱 용기 사용을 줄이기 위해 지금 쓰고 있는 세제를 다 쓰고 나면 고체 세제를 사용할 계획이다. 영수증은 재활용이 불가하다는 것을 알고 영수증 출력 전에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에 익숙해지려 한다. 배달과 배송에서 벗어났을 뿐인데 친환경적 삶에 다가가고 있다. 불편하고 손이 많이 가지만 마음은 더 가벼워진다.


자연을 누리고 싶어 찾아온 제주 그리고 중산간. 자연 속에 사는 것이니 당연하게 따라온 배달과 배송이 없는 불편. 하지만 이 불편은 내가 원했던 자연에 더 다가가게 해 주었다. 인간의 편리보다 자연의 귀함을 앞세우게 됐다. 자연이 내게 주는 행복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도 자연을 행복하게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도 페트병의 라벨과 뚜껑과 고리를 분리한다. 물론 이 글을 다 쓴 다음에는 노트북을 덮고 앞치마를 입을 계획이다. 오늘은 부디 니 맛도 나고 내 맛도 나는 요리를 완성할 수 있기를! 그래서 잔반도 Zero일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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