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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유수집가 Sep 11. 2020

제주도민의 어느 하루

매일 아침, 같은 시각 같은 자리에서 같은 구도로 사진을 찍는다. 하이디를 통학버스에 태워 학교에 보낸 뒤 몇 걸음을 옮겨 선 자리. 멀리 함덕 바다와 서우봉이 한눈에 보인다. 이 풍경을 보기 위해 부러 찾던 제주. 이제는 매일 볼 수 있음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부러 사진을 찍으며 여행자였던 나를 떠올리고 생활인에서 다시 여행자로 돌아간다. 


바다와 서우봉은 매번 그 자리. 하지만 매번 다르게 나를 맞는다. 하늘이 어떤 모습이냐에 따라 드러내는 빛깔과 농도도 다르고 뿜어내는 숨결도 다르다. 특히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어디인지는 매일 봐도 쉬이 알아차리기가 힘들다. 그래도 매번 그 경계를 짐작해본다. 바다와 하늘과 더 가까이 지내고 싶어서이다. 


여행자의 삶은 날씨에 따라 분주함의 정도가 다르다. 오늘은 푸르름이 선명한 날. 후다닥 집으로 돌아와 휘리릭 집안일을 한다. 드디어 10시 41분. 함덕 바다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집 앞 주차장에 새로 장만한 차가 서 있지만, 아직 운전 연수를 받지 못했다. 주차가 불가능한 초보 운전자 그래서 뚜벅이 신세지만 괜찮다. 정해진 시각에 도착하는 버스가 있으니까. 


마스크는 필수. 모자와 팔토시, 텀블러도 챙겼다. 뜨거운 햇살이 반갑다. 바다 빛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오늘도 에메랄드빛 바다가 나를 맞는다. 땀이야 흘리고 씻으면 그만이라는 마음으로 서우봉 둘레길에 오른다. 이어폰도 챙겼지만 필요가 없다. 파도 소리와 새소리로도 이미 충분하다. 앞으로 트인 바다가 하늘과 맞닿아 있고 뒤로는 오름이 하늘과 맞닿아 있다. 앞으로도 뒤로도 막힘없는 시야. 멀리 보는 것이 가능한 삶에서 내 눈이 더 맑아지리라는 기대를 한다. 


뚜벅뚜벅. 발바닥의 감각이 깨어난다. 땅을 디디는 뒤꿈치, 나를 미는 엄지와 발볼 그리고 그 사이에서 늘어나는 발아치까지. 질퍽하든 평편하든 울퉁불퉁하든 땅의 모양과 자연스레 합을 맞춘다. 놓치고 지나쳤던 몸의 감각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땀구멍도 살아난다. 비 오듯 땀을 토해내며 구멍의 크기를 제일 크게 키운 채 비워낸 자리에 맑은 기운을 담는다. 


너무 근사한 풍경에 연이어 사진을 찍다 웃음이 났다. 오늘만 날이 아닌데, 오늘만 걸을 길이 아닌데, 또 오면 되는데 싶어서였다. 잠시 고민했다. 이 사진을 남편에게 보낼지 말지. 어떤 날은 사진을 보내고 어떤 날은 보내지 않는다. 오늘은 후자. 몰아치는 업무로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는 남편. 마음을 흐트러뜨리고 싶지 않았다. 대신 기도를 한다. 그의 오늘이 평안하기를. 그가 오는 주말에도 오늘처럼 날씨가 좋기를. 내가 보는 이 풍경을 그도 직접 두 눈에 담을 수 있기를. 


서우봉을 내려와 함덕 해변에 다다르니 서핑 강습이 한창이다. 8명 남짓의 수강생 중 2명만이 보드 위에서 버티며 파도를 탄다. 두 팔을 벌려 바람을 가르는 포즈가 근사하다. 바다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저들의 도전이 부러워 한참을 바라보다 다시 웃었다. 날씨가 좋다고 서우봉 둘레길을 덥석 걸을 수 있는 나의 삶이 저들에게는 부러울 수도 있겠다 싶어서였다. 


텀블러의 물도 떨어져 단골 카페로 향하며 시계를 본다. 10분 뒤면 버스 도착. 이 버스를 놓치면 1시간 30분을 기다려야 한다. 카페에서 1시간 30분을 보낼 것인지 지금 바로 집으로 향할지 망설였다. 가방에 읽을 책을 챙겨 왔으면 곧장 카페로 갈 텐데 책이 없다. 한껏 맑아진 눈을 핸드폰에 양보하기 싫어 버스를 택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여행자로의 하루는 이어진다. 방과후 수업을 마치고 3시 30분에 하교하는 하이디를 데리러 나선다. 등교는 통학버스지만 하교는 도보다. 수업 전 지치지 말라고 아침에는 버스를 태우지만 하교는 운동할 겸 산책할 겸 20분 거리를 걸어서 온다. 이번에는 수박밭과 귤밭이 나를 반긴다. 먹을 줄만 알았지 어떤 모습으로 결실을 맺는지 관심을 갖지 않았는데 자연스레 관심이 간다. 나뭇잎과 색을 구분하기 어려운 초록 귤. 얼마나 커졌나 언제쯤 노란빛을 띨까 매일 돌담 안으로 고개를 삐쭉 들이밀어 본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수다 떨며 돌아오는 길. 건너편에서 하이디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앞 동 사는 친구. 날씨가 덥다며 차를 같이 타고 가자고 한다. 보통 때는 괜찮다고 걷겠노라 할 텐데 이미 오전 내내 걸었던 나는 고맙다고 덥석 차에 오른다. 그리고 더운 여름을 현명하게 보내고 싶은 두 엄마의 결의. 5시 30분에 만나 함덕 바다에 가기로 한다. 차로 15분. 마음먹으면 바로 바다에 갈 수 있는 일상은 제주로 이사와 누리는 특권이다. 


관광객이 많지 않은 쪽 모래사장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스커피를 들고 돗자리에 앉은 두 엄마. 아이들은 벌써 바다로 들어갔다. 일렬로 걷다가, 한 데로 모였다가, 어깨를 들썩였다가, 물 튀기기를 했다가. 볼 때마다 다른 모습이지만 전해오는 유쾌함은 같고, 들을 때마다 다른 웃음소리지만 묻어나는 경쾌함은 같다. 


해가 이글거린 하루였는데, 늦은 오후가 되어 그 힘을 잃어서인지 바닷물은 시원함을 넘어 차다. 혹시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잠시 마음이 쓰였지만 걱정을 내려놓는다. 이미 벌어진 일. 이 순간의 행복만 담기로 한다. 지는 해가 어른어른 바다에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 위에 웃음을 흩뿌리는 아이들. 아이들까지 하나의 풍경이 된다. 


바다에 가고 싶을 때 '가자'하는 한 마디에 바다에 올 수 있는 삶. 더운 열기를 차가운 바닷물로 식힐 수 있는 삶. 뜨거운 모래의 고운 감촉이 장난감이 되는 삶. 지는 해가 바다에 남기는 황금빛 인사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삶. 까만 바다 위 총총총 떠 있는 한치잡이 배를 바다에서 뜨는 별이라 부를 수 있는 삶. 이 귀한 삶 속에 나와 하이디가 있다. 이 삶을 빠져나오기 싫은 하이디는 10분만 더 10분만 더를 말하고. 이 삶에 계속 머무르고 싶은 엄마도 10분만 더 10분만 더를 허락한다. 7월 어느 하루의 이야기다. 


매일 서우봉에 오르고 바다에 가는 삶은 아니다. 변덕스러운 제주 날씨가 내 발을 묶어두기도 하고, 여행자이기 전에 생활인이기에 발이 묶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여행이 그리 멀리 있지 않음을. 하이디의 등굣길 사진 한 장을 남기는 것도 여행이 되고, 하이디의 하굣길 귤밭을 지나는 것도 여행이 된다. 마을 정자에 앉아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도, 마을을 빙 돌아 산책을 하면서도, 식탁에 앉아 베란다 밖으로 보이는 나무들을 보면서도 여행을 한다. 내 마음을 자유로이 풀어놓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여행임을. 흘러가는 구름, 흔들리는 나뭇가지, 해를 향한 꽃 한 송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자연의 시간을 가늠하는 것도 여행임을. 점점 느려지는 삶 속에서 점점 작은 것에 눈길을 두며 나는 매일 여행을 떠난다. 여행이 이렇게 가까이 있음을 바다를 건너 제주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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