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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실패조차 지켜보는 용기

by 여유수집가

"그렇게 공부해서는 예고 못 가."


싸늘한 내 목소리에 내가 흠칫했다. 과학 자습서를 펼쳐놓고 앉은 딸이 엄지의 거스러미를 뜯었다. "열심히 하고 있잖아." 팩 쏘듯 튀어나온 말에 내가 심했구나 싶으면서도 오히려 전투력이 치솟았다. 딸의 공부 방법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어깨를 점점 움츠리다 고개를 푹 숙이고 마는 딸. 그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언제부터 이런 엄마가 되었을까.


딸이 열 살부터 열셋까지 살았던 제주. 그 시간 동안 내가 크게 배운 건 '다양성'이었다. 제주보다는 서울에 사는 사람이 훨씬 많은데 이상하게도 서울에서는 비슷한 모습들만 눈에 들어왔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곳으로 향하던 회사원의 삶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위로만 향해 있던 내 시선 탓이었을까. 서울은 커다란 덩어리 같았다. 비슷한 사람들이 비슷하게 뭉쳐 있는 모습으로, 비정상적으로 컸지만 다채롭지는 않았다.


제주는 달랐다. 딸이 전해오는 친구들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색깔과 농도가 각각 다른 삶의 결이 느껴졌다.


"엄마, 누구 아빠는 말을 키운대."

"엄마, 누구네 집은 귤농장을 해."

"엄마, 누구 엄마는 도자기를 만든대."


말 목장을 하는 사람, 귤농사를 짓는 가족, 도자기 공방을 운영하는 이웃. 바리스타, 셰프, 서점 주인, 조경사, 화가, 목수, 트럭 운전사, 전기 기술자, 어부까지. 직업의 스펙트럼만큼이나 삶의 방식도 제각각이었다. 누가 더 성공했는지를 비교하지 않고 각자의 속도로 살아가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그 속에 스며들며 우리 가족도 조금씩 다른 속도를 배워갔다.


그렇게 네 해를 살고 서울로 돌아온 지금. 내 삶은 여전히 제주의 속도를 따라 흘러가지만 아이는 그렇지 못하다. 공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중학생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살고 싶다'는 아이의 꿈 때문이다. 꿈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찾은 아이에게선 빛이 난다. 문제는 그 꿈이 점점 시험 위에만 놓인다는 것이다.


공부를 최우선으로 강요하지 않는 엄마가 되려 애썼다. 책과 경험에서 세상을 배우는 아이이길 바라 제주에서도 일부러 시골의 삶을 택했다. 제주에선 그 다짐이 꽤 잘 지켜졌다. 노을 예쁠 날씨면 저녁밥을 먹자마자 항구로 향했다. 그땐 공부보다 오늘의 자연을 누리는 게 우선이었다.


예술고등학교 진학을 준비하는 아이는 노을 대신 방음방에 있고,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아이는 힘들다면서도 바이올린 연습은 기꺼이 감당한다. 문제는 그 연습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 실기 외에 전 과목 성적까지 입시에 반영되니 공부도 잘 챙겨야 한다. 하지만 바이올린 연습만으로도 시간은 부족하기에 공부는 늘 벼락치기다.


기말고사를 며칠 앞둔 지금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깨치고 익히는 힘을 믿고 싶지만, 성적이 나쁠까 불안하다. 과학 자습서를 분명 다 봤다는데, 왜 문제를 풀며 계속 헷갈리는 건지. 분명 중요한 건 쓰거나 입으로 설명하면서 공부하라 했건만 형광펜으로 밑줄만 긋더라니. 옆에서 지켜보며 점점 조급해졌다. 시간은 부족하고, 아이는 여전히 헤매고 있고.


결국 내 입 밖으로 나온 말.

"그건 직접 그림을 그려보고 설명하면서 공부해야지."

"나 그림 잘 못 그리잖아."

"그걸 그대로 그리라는 게 아니잖아. 네모만 그려도 돼."


결국 그림을 그려주고 말았다. 자기주도학습을 바랐는데 엄마 주도로 변질될 위기였다. 딱 하나만 그려주고 손을 뗐지만 아이의 공부하는 모습에서는 시선을 떼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 순간이 왔다.

"이렇게 공부해서는 예고 못 가."


협박 같았던 말. 내 입에서 나올 줄 몰랐던 말. 그 순간 스스로가 참 못난 엄마처럼 느껴졌다. 예고 못 간다고 아이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닌데.


예고에 가고 싶다는 목표, 그건 좋다.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것도 기특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이가 실패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게 만드는 건 좋은 의도가 아니다. 도와주려던 마음이 아이의 삶을 대신 살아주는 방향으로 바뀌는 순간, 또 하나의 '정답'만 있는 세계로 아이를 밀어 넣는 엄마가 되는 거니까.


제주의 다양성을 기억한다. 누가 더 빠른지 누가 더 위인지 따지지 않았던 삶. 정답 대신 각자의 방식이 존중받던 삶. 그 안에서 우리는 조금 더 자유로웠음을 떠올린다. 아이도 다시 그 자유로운 시선으로 자라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엄마인 내가 다양성을 품어야 할 테다. 아이에게 '단 하나의 길만 있다'고 입력하지 않기를.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하되, 다른 선택도 있고 다른 길도 있다는 걸 열어 놓고 알려주기를. 그리고 어떤 길에서든 아이를 대신해 걷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 곁에서 함께 걷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는 엄마이길 바란다.


아이의 삶을 시험 위에 올려둔 채 좁게 밀어붙이지 않고, 넓게 품어주는 엄마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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