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안 쳐?"
제주에 살며 자주 들었던 말이다. 필드 비용이 육지보다 저렴하다며 너도 나도 내게 골프를 권했다. 올레, 오름, 곶자왈 걷기만으로도 바쁜데 골프를 배울 시간이 있을 리가.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제주에 그렇게 자주 가면서 골프는 왜 안 치냐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 심지어 어떤 상사분은 업무상 필요하다며 당장 골프연습장에 등록하라고 술자리에서 호통까지 치셨단다.
"골프? 다른 취미가 더 좋은데..."
상사 앞에서는 침묵했다지만, 지인들에게 남편은 늘 이렇게 답했다. 다른 취미'만' 좋은 거였다면 골프도 한 번쯤 고려했을 텐데, 다른 취미'들'이 다 좋은 바람에 골프는 애초에 우선순위를 벗어났다. 자전거, 등산, 캠핑 그리고 최근엔 달리기까지. 이 취미들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부족했고, 혼자 즐길 수 있어 그에게는 더없이 좋았다. MBTI 'E'지만 업무적으로 사람을 많이 상대하다 보니 '혼자 노는 취미'가 더 좋다고 했다. 그래서 남편에게 골프는 관심 밖.
"서울에서 뭐 할 거야?"
"자전거 타려고."
"혼자?"
"응, 춘천 다녀올 거야."
주말 부부 시절, 남편의 '혼자 잘 노는 능력'은 고마운 재능이었다. 2주에 한 번 제주에 오며 서울에서의 주말도 잘 보내주니 말이다. 다만 문제는 장비였다. 자전거는 서울 한 대, 제주 한 대. 텐트는 서울 한 개, 제주에는 가족용 하나, 1인용 하나. 캠핑 체어는 '용도가 다르다'는 이유로 제주 세 개, 서울 하나를 넘어섰다. 거기다 등산은 두 다리만 튼튼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옷부터 배낭까지 왜 전부 아크테릭스인지 미스터리였다.
명절에 서울집에 들렀다가 딸 방문을 열었을 때, 잠시 말을 잃었다. 가구를 다 제주로 옮겼으니 텅 비어 있을 줄 알았는데 한 벽을 선반이 꽉 채우고 있었다. 캠핑과 등산 장비가 가지런히 전시된 작은 쇼룸이었다. 거실 베란다엔 이미 자전거 전시장이 있는데 말이지.
'여보, 이건 좀 많은 거 아니야?'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켰다. 제주에 살고 싶다는 나를 기꺼이 보내준 남편이니 이 정도는 사치가 아니라 배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한 인내였다.
4년 뒤 서울로 돌아오니 상황은 더 진화했다. 딸 방을 점령했던 선반은 베란다로 밀려났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새 장비가 들어왔다.
"그건 뭐야?"
"내가 계속 말했잖아. 갖고 싶다고."
"그래서 그게 뭔데?"
"그... 힐레베르그 텐트."
텐트계의 에르메스라더니. 언젠간 꼭 갖겠다더니. 진짜 샀다. 설명 역시 완벽했다. 기존 1인용, 3인용은 중고로 팔았고, 새로 산 1인용에 기존의 2인용을 더하면 가족 캠핑도, 혼자 캠핑도 문제없단다. 말로만 들으면 참 합리적이다. 그런데 판 가격과 산 가격을 곱씹다 보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괜히 따져봤자 내 속만 상하니 이번에도 모른 척하기로 했다. 골프비용보단 낫다고, 그렇게 또 정신 승리를 했다.
아직 끝이 아니다. 요즘 남편은 전기 자전거를 노리고 있다.
"우리 집이 언덕 위라서 힘들어. 브롬톤 전기 자전거가 출시 됐어..."
이미 브롬톤이 두 대가 있는 집이다. 전기 자전거까지 들이면 세 대가 된다. 덥석 사지 않고 비싸다고 망설이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인 걸까. 이제까지는 골프 레슨비와 필드비로 정신 승리했다면, 이번에는 골프채 대신이라며 정신 승리를 해야 할까? 부부는 일심동체라더니, 남편 스마트폰 화면에 떠 있는 파란색 전기 자전거가 제법 예뻐 보인다. 나도 살짝 흔들린다. 근데 정말 설마. 이러다 업무 핑계 대고 골프까지 가는 건 아니겠지?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