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저녁, 동네에서 유명한 중국집으로 향했다. 맛집답게 대기가 있었다. 우리는 두 번째 대기팀. 우리 앞 팀은 노부부셨는데 딸에게 자신들 옆 대기 의자에 앉길 권하셨다.
"얼굴이 참 순진해 보이네. 몇 학년이야?"
"중학교 2학년이요."
"어느 중학교 다녀?"
"***중이요."
"국민학교는 어디 나왔어?"
"아, 초등학교요?"
"응, 우리 때는 국민학교였지. 어디?"
"그게..."
정답이 정해진 질문인데 딸은 우물쭈물했다. 곤란해하는 딸 대신 내가 답했다.
"제주도 초등학교요. 제주도에서 살다 왔거든요."
"그래? 제주도가 좋아? 서울이 좋아?"
제주도에서 살고 왔다고 하면 어김없이 듣게 되는 질문은 이번에도 빠지지 않았다. 딸은 이제 여기에 잘 적응했다며 어느 하나도 선택하지 않았지만, 할머니께서는 서울이 더 좋다며 딸 대신 답을 정하셨다.
며칠 전에는 같은 반 친구가 어느 초등학교를 졸업했냐고 물어서 딸은 3학년 초반까지는 **초를 다녔다고만 답했단다. **초는 지금 사는 동네에 있는 초등학교다. 왜 제주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물으니 친한 친구가 아니라서 그랬다고 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2학년인 지금까지 2년 연속 체육을 담당하는 선생님께서는 딸을 '제주도'라고 부르셨다. 입학식 날 바로 서울 중학교로 등교했지만 절차상 전학으로 처리돼 가나다 순의 번호를 어기고 제일 끝번이 된 딸에게 어디에서 전학 온 거냐고 물으신 뒤부터였다. 2학년 때도 체육 선생님께서는 여전히 저를 '제주도'라고 부르신다며 딸은 내게 고민을 꺼냈다.
"엄마, 선생님께 제주도라고 그만 불러달라고 하면 좀 그런가?"
"왜? 엄만 개성 있고 좋은데!"
"아니, 좀 그래. 모르던 애들도 알게 되고."
본인이 싫다면 어쩌겠나. 일단 말은 해보되 선생님이 부탁을 안 들어주실 수도 있다고 조언했다. 딸은 이제 서울에 잘 적응했고 서울 온 지 1년도 넘었으니 '제주도'라고 그만 부르시면 좋겠다고 용기 내 선생님께 청했다. 흔쾌히 알겠다고 하신 선생님께서는 바로 다음 날 딸의 뒤통수를 치셨다. '제주도' 대신 '하르방'이라고 부르신 것. 웃음이 터져버린 딸은 이제 어쩔 수 없다며 선생님의 제주도 사랑을 인정하기로 했단다.
딸이 제주도에 살았던 것을 우물쭈물 숨기는 건 제주도에 살았던 것이 창피해서가 아니다. 제주도에서 살다 왔다고 하면 갑자기 관심이 깊어져서 부담스럽기에 말하기 싫다고 했다. 다들 부러워서 그러는 건데 어떠냐고 했지만, 딸의 마음도 이해는 됐다. 친한 친구의 관심은 좋아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지나친 관심은 버거운 나이니까. 잠깐 만난 중국집에서의 할머니가 물었던 '제주도가 좋아? 서울이 좋아?'라는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얼마나 많이 들었을지.
"그래서 넌 서울이 좋아? 제주도가 좋아? 택할 수 있어?"
"둘 다 좋지. 그걸 어떻게 골라. 그리고 지금 서울 사는데 지금은 서울이 더 좋아야 하는 거 아니야?"
사실 나는 제주도가 더 좋다고 답을 하는데, 나보다 더 현명한 딸이었다. 지금 내가 사는 곳을 좋아해야 여기서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거니까. 제주도에 살다 왔음을 우물쭈물 숨기는 딸을 이해하며 상쾌한 봄밤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비록 해송 숲길이 아닌 빌딩 숲길을 지났지만 곳곳에 숨겨진 봄꽃을 찾으며 다정하게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