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16일, 하교한 중학교 2학년 딸에게 물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알아?"
"오늘?"
"4월 16일."
"아, 세월호 참사일이네. 왜 학교에서 아무 말도 없었지?"
잠시 침묵하던 딸은 나지막이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노래를 시작했고 나도 같이 불렀다.
태어나서 초등학교 6학년까지 경상북도 포항에서 살았던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은 전라남도 순천에서 보냈다. 굉장하다는 말이 경상도에서는 억수로, 전라도에서는 허벌나게로 쓰이는 격차만큼 두 지역에서의 삶은 다른 점이 많았다.
중학교 1학년, 하굣길에 버스가 갑자기 멈춰 섰다.
"시위가 있어서 멈췄다가 가겠습니다. 오른쪽 창문은 닫고 왼쪽은 살짝 엽시다."
버스 기사의 안내였다. 펑펑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바깥의 소란스러움과는 달리 버스 안은 조용했다. 나만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따가운 눈을 손으로 비비려는데 앞에 앉아 계신 아주머니께서 내 손을 잡아 끌어내리며 손수건을 쥐여주셨다.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시위를 하네. 최루탄 가스라 비비면 더 따가워. 손수건으로 코 막고 있어. 어째 좋은 뜻 외치는 건데 우리가 기다려줘야지."
초등학교 때는 집과 학교를 걸어서 오가느라 몰랐던 것일까. 처음 겪는 상황에 어리둥절했지만 버스 안 승객 모두가 침착했기에 나 역시 콧물을 훌쩍이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저 얌전히 서 있었다. 시위대가 지나가고 버스가 다시 출발하는데 다들 검은색 옷을 입고 쫓아가는 경찰을 걱정하는 것이 아닌 대학생 언니, 오빠들을 걱정했다. 약속 시간에 늦었다거나 하는 불평은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낯선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았다.
선생님들로부터 현대사를 배우고 비슷한 상황을 여러 번 겪으면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침착한 버스 승객이 됐다. 버스는 멈춰도 민주주의를 나아가게 하려는 시위가 반가웠고 시위에 참여한 대학생을 동경했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버스 밖 사람 대부분이 정의를 알리는 대학생을 지지하리라 믿었다.
대학생이 되어 서울로 왔더니 내가 자란 전라도는 특수 환경이었다. 대다수 지역에서 시위를 지지하는 어른은 보기 힘든 풍경이었고, 5.18 민주화운동을 아는 친구는 더러 있어도 여순사건을 아는 친구는 없었다. 분명 경상도에서 12년을 살았고 전라도에서 산 건 그 절반인 6년이었지만 전라도가 내게 끼친 영향은 컸다.
딸은 초등학교 3학년부터 6학년까지 제주에서 지냈다. 매년 봄이 되면 제주 전역에는 '제주 4.3'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렸다. 학교에서는 4.3 교육주간을 지정해 '제주 4.3'을 기억했다. 딸은 어떻게 두 살, 네 살 아기들도 군인과 경찰에게 희생되는 일이 있을 수 있냐며 참담하다고 했고 생각보다 더 슬퍼서 잘 기억해야겠다고 했다. 10년, 50년이 넘어서도 잊지 않을 거라는 다짐도 빼놓지 않았다.
제주의 아픈 봄은 4월 3일에서 멈추지 않았다.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역시 함께 기억했다. 세월호제주기억관에서 딸은 모두 구할 수 있었는데 왜 구하지 못한 거냐며 눈물을 글썽였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억하겠다고 했다. "엄마, 4월은 참 아픈 달이야."
12.3 비상계엄 후 12월 14일 딸과 함께 여의도로 향했다. 탄핵 시위에 함께 하기 위해서였다. 대중교통이 통제되며 딸은 서강대교를 걸어서 건넜다. 바람 불고 춥고 배고프다며 다리를 건너는 내내 투덜거렸지만 집회 현장에서는 누구보다 크게 탄핵을 외쳤다. 제주 4.3에서 계엄령은 죄 없는 국민을 죽이는 명령이라고 이해했던 딸에게 윤석열의 비상계엄은 있어서는 안 되는 사건이었다. 국민을 위하지 않는 대통령은 필요 없음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전라도에 살며 현대사를 제대로 배웠고, 딸은 제주도에 살며 아픔을 기억하는 연대를 제대로 배웠다. 기꺼이 집회에 나가고 윤석열이 파면되는 순간까지 관심을 놓지 않았던 건 배움의 힘이었다. 여전히 윤석열이 어떤 죗값을 치르게 될지 딸과 지켜보고 있다.
딸은 중학교 2학년이 되며 세계사를 배운다. 내년에는 한국사를 배울 테고.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라는 사춘기. 이제는 서울에 살게 된 딸이 사는 곳에 영향받지 않고 제주 4.3을, 여순사건을, 세월호 참사를, 12.3 비상계엄을 그리고 또 다른 민주 항쟁사를 제대로 배워 바른 역사관을 가지면 좋겠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