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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뮤지컬 덕후를 지지한다

by 여유수집가

딸과 함께 뮤지컬 '알라딘'을 봤다. 중학생 일정이 바빠 토요일 저녁 공연을 봐야 하다 보니 예매가 쉽지 않았다. 티켓 오픈 일정을 알람으로 해두고 신의 손에 도전했지만 내 손은 그냥 손이었다. 초연이니 내년을 노려볼까도 싶었지만 쉽게 포기가 안 됐다. 뮤지컬 덕후인 딸이 바라서였다. 취소표를 기대하며 수시로 '알라딘' 예매 사이트에 들락거리는 내가 짠했는지 알고리즘이 나를 '알라딘' 예매 이벤트로 안내했고, 바라던 일정에 좋은 자리를 예매할 수 있었다.


'마틸다'와 '빌리 엘리어트'를 볼 때까지만 해도 딸은 뮤지컬 덕후가 아니었다. 제주에서 4년을 살고 서울로 다시 돌아온 작년 2월, 서울 복귀 기념으로 제주에서는 볼 수 없었던 뮤지컬을 봤다. '레미제라블'이었다. 이 공연을 보고 온 이후 딸은 '레미제라블' 프로그램북을 보고 또 보더니 핸드폰을 할 때면 '레미제라블'만 찾아봤다. 그러다 주인공이었던 민우혁 팬이 되겠노라 선언했다. 팬심을 발휘하며 나무위키의 민우혁 정보를 줄줄 외우던 딸은 5개월 후 '영웅'을 보게 됐다. 역시 민우혁 캐스팅으로. 이때부터 딸은 자신을 뮤지컬 덕후라고 불렀다.


바이올린을 전공하겠다는 딸에게 시간이 나면 바이올린 공연을 권했다. 게다가 뮤지컬은 워낙 비싸고 예매도 어려우니 덕후력은 인터넷 세상에서 키우기를 바랐다. 그래도 정말 보고 싶다고 간절히 말하면 마냥 외면하기는 어려웠다. 나도 뮤지컬을 좋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딸의 검색어에 뮤지컬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서였다. 그렇게 1학년 2학기 기말고사가 끝난 12월, '지킬 앤 하이드'를 봤다.


'레미제라블'에서 '민우혁', '영웅'을 지나 딸은 핸드폰으로 '지킬 앤 하이드'를 검색했다. 우리는 정동석 캐스팅을 봤는데 딸은 다른 주연 배우들까지 찾아봤다. 그러고 나면 배우들이 출연한 다른 뮤지컬까지 호기심은 확장되어 검색어의 대부분은 뮤지컬 관련이 차지했다. 유튜브도 인스타그램도 알고리즘에 따라 딸에게 온통 뮤지컬 영상만 보여줬다. 그러다 보니 '알라딘'이 자주 노출됐고, '알라딘'을 보고 싶다는 말로 이어졌다. 내가 보여주겠노라 답하지도 않았는데 '알라딘'의 매력을 설명하고 히트 넘버를 흥얼거리기까지 하는 딸을 보며 내 손은 당연히 예매 사이트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알라딘'을 보고 온 딸의 세상은 '알라딘'으로 가득 찼다. 이번에는 알라딘을 연기한 박강현 팬을 선언하며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까지 박강현으로 바꿨다. 의미 없는 게다가 해롭기까지 할 수도 있는 쇼츠와 릴스에 빠지는 대신 뮤지컬 영상을 보고 있으니 핸드폰을 쥐고 있는 딸의 손을 조금은 부드럽게 바라보게 됐다.


딸은 '알라딘'을 자신이 지금껏 본 뮤지컬 중 1위로 평가했다. 1위의 위력이 엄청나 다음 뮤지컬을 한참 뒤에 봐도 되도록 딸의 알고리즘에 뮤지컬이 오래오래 자리하면 좋겠다. 사춘기와의 전쟁에서 쇼츠와 릴스를 아예 차단할 수 없으니 그나마 조금이라도 덜 유해한 것으로 봤으면 하는 마음에 딸이 뮤지컬 덕후임을 지지하기로 한다. 돈을 더 쓰는 게 감정을 더 쓰는 것보다는 모녀 관계에 더 나으리란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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