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뚱이. 우리 부부가 딸을 부르는 애칭이다. 딸의 볼록한 배에 푸르르 배방구를 하며 나와 남편은 딸을 배뚱이라 불렀고, 밥을 양껏 먹고 볼록해진 배를 둥둥 두드리는 딸에게 ‘우리 배뚱이 배불러서 기분 좋아?’라고 했다. 딱 붙는 내복을 입고 노래를 부를 때면 딸은 배를 더 앞으로 내밀었는데 이때도 우리 부부는 물개 박수를 치며 어김없이 '배뚱이 최고!'를 외쳤다.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춤을 출 때면 엉덩이는 뚱 나오고 배는 쑥 들어갔지만 딸은 그저 우리에게 배뚱이었다.
‘배뚱배뚱 배뚱이’라며 음률까지 맞춰 호응하던 딸이 언제부터인가 배뚱이를 거부했다. 나와 남편이 배뚱이라 부르면 딸은 째려보거나 화를 버럭 냈다. 외모로 놀리는 건 폭력이라는 논리도 펼쳤다. 배뚱이는 놀리려고 부르는 별명이 아닌 다정하게 부르는 애칭이라고 항변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십 년이 넘는 배뚱이의 역사를 단번에 지우는 건 불가능했다. 딸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순간이면 부지불식간에 배뚱이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분명 사랑스러워서 딸을 배뚱이라 불렀는데 딸은 노려보는 온도 차가 거듭되자 ‘배’까지 입 밖으로 나왔다가 ‘뚱이’는 꿀꺽 삼키는 일이 잦아졌다.
말은 삼켰지만 마음은 삼켜지지 않았다. 배뚱이는 사랑스러운 딸, 귀여운 딸의 모습을 주르륵 연상시키는 애칭이었기에 사라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싫다는 딸을 무시할 수도 없어서 딸 등 뒤에서 속삭이듯 불렀다. '방금 배뚱이라 그랬지?'라며 종종 딸에게 들키기도 했지만 딱 잡아떼는 것으로 상황을 모면했다. 몰래 부르다 사라질 애칭이라 생각했던 배뚱이가 얼마 전부터 다시 딸 앞에 등장했다.
딸이 배뚱이라는 애칭의 소중함을 깨달아 배뚱이라 부르라고 허락한 건 아니었다. 반려견이나 반려묘가 가족이 되며 배뚱이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도 아니었다. 남편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딸이 있는데 그 아이의 애칭이 배뚱이라고 한 것이 시작이었다.
"선유야, 아빠 친구 딸 배뚱이는 그렇게 젤리를 좋아한데. 매일 편의점에서 젤리를 사 먹는다네. 몸에도 좋지 않은 젤리를. 넌 안 그러지?"
"선유야, 아빠가 차로 지나가다가 하교하는 배뚱이를 봤거든. 반가워서 불렀는데 핸드폰 보느라 아무리 불러도 모르더라. 길에서 핸드폰 보는 거 진짜 위험하잖아. 선유는 안 그럴 텐데. 배뚱이는 왜 그러나 몰라."
남편이 배뚱이란 친구 딸을 처음 언급했을 때, 딸은 고개를 갸웃하며 꼬치꼬치 물었다. 몇 살이냐, 어느 학교에 다니냐, 아빠랑 어떤 친구냐, 어디 사냐. 남편은 척척 대답했다. 딸 보다 한 살 어리고, 딸과 같은 중학교에 다니고, 친구 사이는 오래됐지만 얼마 전에 이 동네로 이사와 오랜만에 만난 친구이고, 바로 옆 단지에 산다고 했다. 긴가민가하던 딸은 아빠 친구 딸 배뚱이의 행동이 자신과 100% 일치하자 '거짓말이지?'라며 따져 물었지만 남편은 진짜임을 고수했다. 부모의 당부가 잔소리가 되어 외면되지 않길 바라는 묘책이었다.
"어휴, 배뚱이는 왜 그런데. 1학년이라 그런가 봐. 난 이제 매일 젤리 안 먹지."
"길에서는 연락 오는 거 확인하는 정도만 핸드폰을 해야지. 쯧쯧."
가짜 배뚱이를 말하는 남편에게 딸은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관객인 나까지 극 속으로 끌어들이는 코믹 연기 달인 부녀의 등장이었다. 내가 '어머, 아빠 친구 딸 배뚱이랑 너랑 너무 닮았다.'라고 하면 딸은 천연덕스럽게 자신은 그런 이상한 아이가 아니라며 우쭐 연기를 펼쳤다. 그러면 남편은 때를 놓치지 않고 '그럼 우리 딸은 안 그러지'라며 행동 교정에 들어갔고. 남편이 연출한 꽁트에 잔소리가 잔소리이지 않게 됐다.
가짜 배뚱이를 거치지 않고 딸에게 직접 말했다면 대번에 날 선 반응이 돌아왔을 텐데 자신은 그런 아이가 아닌 척 연기하며 딸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해야 할 말을 하는 부모와 듣기 싫어 뚱한 딸의 대치가 아니라 해야 할 말을 징검다리를 두고 하는 부모와 자기는 더 나은 아이라고 다짐하는 딸의 소통이 됐다. 그것도 냉랭한 분위기가 아닌 재미난 분위기에서 말이다. 모난 사춘기의 뾰족함을 뭉툭하게 갈아내는 힘은 위트에 있는 게 아닐까. 가짜 배뚱이의 위력이 그리 오래갈 것 같지는 않지만 괜찮다. 다른 꽁트를 만들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