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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슬기 Oct 16. 2024

"아직 살아 있네."

소설 <동산리 히든 할매들과 만나다방> 1화

여자는 한 손에는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론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짜증이 잔뜩 섞인 눈으로 눈앞에 선 사람을 노려보았다. 걸음마도 못 뗀 작은 아이가 여자의 품에서 칭얼대기 시작했다.


“초인종 누르지 말라는 글씨 못 봤어요? 그리고 아까 인터폰으로도 말씀드렸는데, 저희 배달 안 시켰다고요.”


주현은 배달 봉투에 붙어 있는 영수증을 다시 살펴보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복도 조명이 어두웠다. 짙은 필름지를 붙인 바이저를 반쯤 올렸다가, 탈칵 소리가 나게 다시 닫았다.


“501호….”


주현은 굵은 펜으로 영수증 위에 휘갈겨 쓴 숫자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읽었다. 배달 실수는 좀체 없는 일이었다. 당혹감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괜한 배달 실수나 갈등이 생기면, 변명이나 해명을 하려 입을 열어야만 하는 일이 일어났다. 여자 라이더라는 걸 알리는 일은 그리 안전한 일이 아니었다는 걸 지난 시간이 알려주었다. 얕잡아 보거나 혹은 연민하는 모든 시선들은 주현의 남은 에너지를 빠른 속도로 갉아먹었다. 피곤했고, 때론 위협적이었다. 여자는 주현을 다시 한번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한숨을 푹 쉬고는 조금 누그러든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요. 제가 배달 안 시켰으면, 누가 저희 집 주소로 잘못 썼거나 그랬겠죠.”

“죄송합니다.”


주현은 제 할 일을 했을 뿐이고, 실은 미안한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으나 죄송하다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었다. 여자는 문을 닫으려다 말고 잊은 것을 떠올렸다는 듯 다시 문을 열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오른발 한쪽을 간신히 내밀었다. 유연한 발목을 까딱거리며 발끝으로 현관문 밖에 내놓은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가리켰다.


“제가 이렇게 부탁을 하는 사람은 아닌데, 그쪽도 실수를 조금 하신 거니까. 그렇다고 무리하는 건 아니고, 내려가는 길에... 입구 바로 옆 공용 쓰레기통이... 진짜 내려가는 길이시니까."


여자는 아이를 어르고 달랠 때처럼 상냥한 목소리를 내며, 멋쩍게 웃고 있었다. 물론 자신이 내뱉은 요청을 철회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주현은 후회했다. 습관처럼 내뱉은 '죄송하다'는 말이 볼모로 잡혔구나. 여자는 그런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잡아내고 적절한 거래를 제안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501호의 열린 문틈이 서서히 좁아졌다. 띠리링. 도어록의 잠금장치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열대야가 일주일째 지속되던 여름밤이었다. 복도 센서등이 꺼졌는데도 주현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헬멧 안이 후끈거렸고, 장맛비를 맞은 것처럼 뒷목을 타고 흐른 땀으로 온몸이 젖을 지경이었다. 헬멧 바이저를 위로 올렸다. 이대로 숨이 콱 멎어버려 죽을 것 같았는데, 조금 살 것 같았다.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팽팽하게 부푼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집어 올렸다. 흡사 토사물 같기도 한 부패된 음식들이 가득했다. 뜨끈하게 데워진 공기 사이로 음식물 쉰 내와 배달하지 못한 치킨 기름 냄새가 뒤섞였다. 잠시 고민하던 사이 음식물 쓰레기봉투의 묶음 부분이 서서히 풀리고, 이내 한쪽으로 치우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풀어헤쳐진 봉투가 철퍼덕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역한 냄새가 더 빠르게 퍼져 나갔다.


“... 씨발.”


음식물 쓰레기봉투도 터지며, 주현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도 끊어졌다. 주현은 헬멧을 다시 고쳐 쓰고, 터진 음식물 쓰레기를 등 뒤로 한 채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빌라는 내려가는 것도 일이었다. 3층쯤 내려갔을까, 주현은 '아차'하고 혼잣말을 하며 다시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손에 들고 있던 치킨 배달 봉투를 501호 문 앞에 가지런히 놓았다. 현관문의 501호 팻말이 잘 보이도록 휴대전화 카메라를 잘 조정한 뒤, 찰칵 사진을 찍었다. 터진 음식물 쓰레기가 한 프레임 안에 담겼다. 배달 앱에 업로드하고, '배달 완료' 버튼을 눌렀다.


“끝이다. 완전히 끝! 안 해. 더러워서 진짜.”


주현은 조만간 배달 일을 그만두려고 했다. 그게 지금 당장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안 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죽게 될 텐데, 구질구질하게 하루이틀 정도 연장한들 크게 달라질 일은 없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그런 본능에 가까운 의지가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아마 할 수도 없을 것이었다. 모든 게 소진됐다. 힘도, 그 힘을 만드는 돈도.


집 근처에 도착해 자주 오토바이를 세워두던 곳에 멈춰 시동을 막 껐을 때였다. 검은색 구형 그랜저 운전석 창문으로, 중년 남자가 고개를 내밀고 고함을 치듯 얘기했다. 


“아줌마! 차 들어가야 되니까, 오토바이 다른데 대시라고요.”


주현은 미간을 찌푸리는데도 꽤 많은 힘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남자의 말은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서른셋. 물론 501호의 애 엄마가 자신보다 훨씬 어렸을지도 모른다. 아줌마로 보일 수도 있긴 하겠지. 오늘부터 우리 정부에서는 서른 살 이후는 모두 공식적인 아줌마가 됩니다. 주현 모르게 정부가 무언가를 발표했을지도 모를 일이었고.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남자의 날카로운 말은 주현의 재가 된 마음마저 뒤집어엎는 듯했다. 게다가 주차 자리는 널널했다. 오토바이는 차도 아닌가. 여러모로 억울했다.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이 기분 나쁘게 얼굴 이곳저곳에 달라붙었다. 얼른 집으로 올라가 씻고 싶었다. 온몸이 땀에 절었고, 음식물 쓰레기봉투가 터지며 내용물이 튄 것인지 온몸에 썩은 내가 진동하는 것만 같았다. 


주현은 이런 상황에선 상대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걸 잘 알았다. 축축하게 젖은 헬맷을 다시 뒤집어썼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만 같았다. 뒤통수로도 볼 수 있는 사람처럼, 남자의 불만스러운 눈빛이 그려지는 듯했다. 몸이 고장 난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가는 것 같았다. 오른발과 왼발, 오른손과 왼손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교차하며 인간답게 걸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빠앙- 날카로운 경적 소리가 돌부리처럼 자꾸만 걸렸다. 아줌마, 딸배년, 미친년 같은 주현을 부르는듯한 단어들이 자꾸만 뒤통수에 달라붙었다. 주현은 평소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언덕길을 따라 올라갔다.



오래된 지물포 가게를 경계로 공현동 재개발 1 구역이 시작된다. 건물 철거를 위해 세워둔 방진막은 빠른 속도로 높아져 갔고, 이제 주현이 살던 건물도 모조리 가렸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주현 역시 이 길을 따라 오토바이를 몰고 와 제 집 앞에 주차를 할 수 있었다. 동네 초입에 있는 남의 집 빌라에 몰래 세워두고, 아줌마나 딸배 소리를 귓등으로 들으며 헬멧을 다시 뒤집어쓴 채 땀을 흘리며 언덕을 오를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현은 주옥빌라 뒤편으로 조심조심 걸어갔다. 가로등 불빛도 닿지 않는 캄캄한 곳에 이르러서야 헬멧을 벗었다. 방진막 사이의 좁은 틈 사이로 몸을 집어넣었다.


가난한 사람들마저 다 떠난 동네는, 여전히 가난할까. 재개발 이주가 끝나 이젠 아무도 살지 않는 황폐한 이곳에 주현은 혼자 남았다. 전기와 가스는 끊긴 지 오래였다. 다행히 수도는 쓸 수 있어서 주현은 거리로 나앉는 대신 남는 것을 택했다. 주현은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사치를 꽤 적극적으로 누리는 편이었다. 물건의 형체만 분간할 수 있는 어둑한 화장실에서, 주현은 배달 일이 끝난 뒤 몇 번이고 샤워를 하곤 했다. 이날도 내리 세 번을 씻었다. 처음엔 더위를 씻어냈고, 그다음엔 아직 가시지 않은 온갖 냄새를 지우기 위해, 그리고 그다음엔 오늘 들었던 말들을 지우기 위해 씻었다. 땀에 전 브래지어와 팬티도 손 빨래했다. 수건으로 짧은 머리를 대충 털고, 젖은 팬티와 브래지어를 다시 입은 채 방 한가운데 벌렁 드러누웠다.


- 배달용 오토바이 VF100 81만 원. 배달 셋팅. 급처. 엔진, 바퀴 전체적으로 양호. 


휴대전화로 중고마켓에 글을 올렸다. 사진은 처음 중고로 오토바이를 샀을 때 찍어두었던 것을 썼다. 배달하는 2년 동안 낡은 오토바이는 훨씬 더 낡고 볼품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10분도 안되어 몇몇 사람에게 문의가 왔다. 오토바이 제조사에게 물어봐도 대답하기 힘들 까다로운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바로 차단 버튼을 눌렀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소위 ‘쿨거래’를 한다는 사람에게 계약금 10만 원을 받고 오토바이를 넘기기로 했다.


- 방금 전까지 일하던 오토바이라 성능 문제없고, 배달 일 더 안 할 거라 환불 절대 불가.


하루 벌어서 하루를 버티는 인생이었다. 잔액부족으로 카드 결제가 안 되는 일은 다반사였다. 배달 앱 수익 출금 신청을 해두고, 입금되는 때까지 돈이 없어 밥을 굶어야 하는 날도 종종 있었다. 하루에도 서너 번씩 은행 앱에 접속해 잔고를 확인하는 습관이 생긴 것도 그 때문이었다. 10만 원이 예약금으로 이체됐다는 알람이 떠올랐다. 앱을 굳이 켜보지 않아도 잔액이 얼마일지 눈에 훤하게 그려지는 듯했지만, 주현은 은행 앱을 또 켜서 잔액을 헤아려보았다. 10만 8천6백5십 원. 자꾸 들여다본다고 돈이 제 몸을 불릴 것도 아닌데 그랬다.


배가 고팠다. 냉장고 문을 괜히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전원이 꺼진 지 오래인 냉장고에선 쿰쿰한 냄새가 났다. 냉장고 문을 열고 닫는다고 해서, 없던 것이 갑자기 생겨나지 않을게 분명한데도 주현은 계속해서 냉장고 문을 열어보았다. 시원한 탄산음료 한 캔이 간절했다. 밀키스. 암바사 말고 밀키스. 몇 주 전 주현은 콜을 기다리며 편의점 앞 테이블에서 밀키스를 사 마셨던 때를 떠올렸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큰 목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듣고 싶지 않아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빨간색 야구 모자를 쓴 사람이 1주일도 안돼 한 달 치 용돈을 모두 써버렸다고 푸념했다. 청자켓을 입은 사람이 별 일 아니라는 듯 아르바이트를 하면 되잖아, 하고 말했고 야구 모자는 부모님이 반대하는 게 지상 최대의 난제인 것처럼 속상해했다. 청자켓 역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얘기를 꺼냈다. 하는 수 없지. 집에 있는 밥이랑 반찬 먹으면서 버텨야지. 주현은 다 마신 캔을 조금 찌그러뜨렸다. 쌀 10kg 2만 5천 원, 김치 1kg 2만 원. 계란 30구 9천 원, 한 알에 3백 원. 물론 재료 값이 문제가 아니다. 더 근본적인 건 그 ‘집’이 집으로 유지되기 위해 드는 돈 그 자체다. 주현은 야구 모자와 청자켓이 부모의 집으로 당연한 듯 들어가 그들이 채운 냉장고의 신선한 음식을 꺼내먹고, 깨끗하게 잘 세탁된 침대에 드러누워 어떻게 하면 용돈을 더 받을 수 있을 것인가가 하루의 가장 큰 고민인 것을 상상해 보았다. 경험하지 않은 것을 상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는 깨달음만 얻었던 날이었다.


주현은 옆으로 누워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배달 앱 고객센터에서 걸려온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가득했다.


“뭐 어쩌라고.”


주현은 배달 가는 가게에서 틈틈이 충전해 둔 대용량 보조 배터리를 휴대전화에 연결했다. 인스타그램을 켰다. 화면 속 세상은 언제나 화려하고 밝다. 젊고 생기가 넘치고, 짧고 빠르고 가볍다. 지긋지긋하게 늘어지는 실제의 삶과는 너무도 다르지만, 화면 속 세상이 훨씬 더 보통의 인생처럼 느껴진다. 주현은 국적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즐겁고 쾌활한 삶의 순간들에 자꾸만 빠져든다. 당장 살아내야 하는 비루한 인생보다, 화면 속 화려한 인생이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진다. 주현은 애써 이 모든 풍경에 기꺼이 중독되길 바란다. 환각과도 같은 화면 속에 무한히 흘러가는 것들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따악, 딱


한 때는 단단했던 것들이 세월에 꺾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이주하고 없는 재개발 동네의 새벽은 온갖 건물들이 낡아가며 앓는 소리들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흔히 듣는다 하여 적응되는 것은 아니었다. 주현은 이 소리가 들릴 때마다 텅 빈 벌판에 마지막 남은 고목을 커다란 도끼로 찍어 누르는 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무섭게 고요한 새벽, 온 신경이 곤두섰다. 오래된 건물은 지금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살 의지도 없지만, 죽을 용기도 없었다. 죽음을 생각하면 아득하게 두려웠고, 사는 걸 생각하면 온몸을 도끼로 찍히는 듯한 두려움과 통증이 밀려왔다. 그 어떤 것도 택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남은 건 지독한 무기력뿐. 주현은 무너진 건물 아래 깔려 몇 날 며칠이고 숨이 붙어 있는 상태로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보내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그런 상상은 이상하게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주현은 유튜브 앱을 켜, 하고 싶은 아무 말이나 입력하기로 했다. 고립. 다양한 영상들이 떠올랐다. 주현은 그중 BBC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의 짧은 클립 하나를 눌러보았다. 갈라파고스의 친구들. 공룡을 연상케 하는 덩치가 크고 인상이 험악한 이구아나가 해안가의 검은 바위 위를 어기적거리며 걷는 영상이 재생되었다.


“갈라파고스 해양 이구아나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바다에서 생활하는 도마뱀입니다. 주로 해조류를 먹고살며, 바다에서 먹이를 찾기 위해 무려 30분 가까이 잠수를 해 머무릅니다. 육지에 올라온 뒤엔 몸을 데우기 위해 햇빛을 쬐며 시간을 보내고, 코에서 소금물을 내뿜습니다. 군집 생활을 하며,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가까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네 발로 느릿느릿 걷고 있는 해양 이구아나의 영상과 함께, 나긋한 목소리의 내레이터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곳의 이구아나 초기 개체는 우연히 갈라파고스 제도에 불시착하게 됐고, 이곳의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잠수를 하고 해조류를 처음 뜯어먹었다고 했다. 태풍에 휩쓸려, 혹은 물살에 떠밀려 낯설고 고립된 섬에 도착한 이구아나. 주현은 어쩐지 슬퍼졌다. 목이 말라서 마신 바닷물의 살벌하게 짠맛도, 첫 잠수에서 숨이 쉬어지지 않는 고통도, 해조류의 비릿한 맛도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날 밤, 주현은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바위 위를 막막한 마음으로 걷는 이구아나가 되었다. 도와줘요. 이구아나의 말로는 외쳐보았지만, 듣는 이라고는 부리 모양이 특이한 핀치 새뿐이었다. 


*


오토바이 중고 거래는 세 번이나 불발됐다. 분명 이곳까지 잘 타고 와 주차까지 마쳤는데,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헛걸음을 한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화를 냈다. 주현은 그들보다 더 크게 화를 냈다. 가진 것 없고 기댈 곳 없는 주현은 적반하장이란 단어를 온몸으로 익혀 왔었다. 다행히 오가는 교통비를 요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주현이 가장 걱정하던 일이었다.


마지막 거래자를 만난 이후로, 주현은 빌라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아니, 나가지 못했다는 것에 가까웠다. 그게 벌써 2주일 전이었다. 주옥빌라와 가까운 곳에서 건물 철거가 한참 진행 중이었다. 헬멧을 쓴 사람들이 주현이 다니는 길목으로 자주 오가는 듯했다. 외출을 하면,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통장 잔액이 0원이 된 지도 오래였다. 한낮의 집은 찜통 같았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물 마시는 것으로 타는듯한 갈증과 배고픔 모두를 해결했다. 물을 마시기 위해 일어서는 일을 제외하곤, 가만히 누워 천장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하는 일도 이제 사치처럼 느껴졌다. 건물이 무너지기 전에 잠들듯 죽는다면 그건 불행 중 다행일 것이었다.


알고 지냈으나 지금은 연이 끊긴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불러와 천장에 붙여보았다. 인연의 시작은 모두 달랐지만, 마지막은 대체로 비슷했다. 부탁이야, 이제 찾아오지 않으면 좋겠어. 주현이 찾지 않는 그들은 이제 평범하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까. 주현은 몸을 아주 조금 뒤척였다. 뼈가 살을 찌르는 불편함이 느껴졌다. 한눈에 보기에도 팔과 다리가 곧 죽을 사람처럼 앙상해졌다. 똑바로 누워 가지런히 두 손을 가슴 위에 올려보았다. 딱딱한 가슴뼈가 느껴졌다. 한 때는 택배의 완충재처럼 둥글고 팽팽하게 부풀어 있던 가슴이 오간데 없었다.


한 때엔 다이어트를 생각할 정도로 체중이 불어났던 시기도 있었다. 삶의 모난 부분도 폭신하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그때엔 이 집을 제 집처럼 드나들다가 아예 짐을 싸 들어와 살았던 남자도 있었다. 일해서 번 돈을 한 데 모아 월세를 내고, 생활비를 충당하고, 적게나마 저축도 했던 시절이었다. 주현을 제수씨라 부르며 놀러 오는 남자의 친구들도 알고 지냈고, 친구의 애인들이나 모임 사람들과 교류하며 지냈다. 그때엔 당연히 누려야 하는 것들로 생각했지만, 돌아보면 주현 인생에서 꽤 특별한 시간이었다. 그날의 저녁 메뉴를 정하는 것이 하루 중 가장 큰 고민이었던 날이 이어졌다. 이렇게 살다 보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기르는 것이 당연할 줄만 알았다. 남자가 인터넷 도박에 빠져, 주현 명의로 거액의 빚까지 남기고 도망가기 전까지는.


무더워지는 날씨 탓인지, 정신이 아득해지는 때가 더 잦아졌다. 낮에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큰 차바퀴 구르는 소리와 고함치는 소리가 더 빈번하게 들려왔다. 주현은 아주 느릿한 동작으로 집에 있는 옷 중 가장 말끔한 것을 찾아 갈아입었다. 어떤 상태로 발견될지 모르지만, 아니 발견조차 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주현은 마지막 남겨질 모습을 생각했다. 죽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이토록 죽음이 가까워진 것은 처음이었다.


흰 프릴이 달린 셔츠와 청바지였다. 남자를 처음 만날 때 입었던 옷이었다. 늦가을에 입었던 옷이었지만, 무척 헐거워져 더운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산채로 관속에 들어가는 마음으로 눅눅한 이불 사이를 벌려 들어갔다. 도태된 자연사에 가까운 죽음. 누구나 언젠가 마주할 순간을 조금 당긴다고 해서 더 슬플 일은 아니었다.


쾅!

부서지는 소리.

저벅저벅.

다급히 걷는 소리.

웅성웅성.

몇몇 사람이 말을 섞는 소리.


무척 가깝기도, 아득하게도 느껴지는 소리가 주현의 귓가를 맴돌았다. 건너편 건물처럼 주옥빌라도 무너지고 부서질 시간인 듯했다. 눈을 뜨고 생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볼 것인가, 눈을 감을 것인가. 주현은 생각하다가 눈을 그대로 감고 있기로 했다. 무너진 잔해들 사이에 흩어진 자신의 팔과 다리를 보는 건 아무래도 생의 마지막 장면으로 그리 탁월한 선택은 아니었다. 남아 있는 힘을 모두 짜내 눈꺼풀을 닫는 데 쓰기로 했다. 그때 꿈 속인 듯 몽롱하게, 그러나 분명하고도 선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직 살아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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