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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슬기 Oct 18. 2024

“다 너를 위해서 그런 거지.”

소설 <동산리 히든 할매들과 만나다방> 3화

꿈을 꾸었다. 아버지와 살던 옛 집이었다. 꿈속의 주현은 몸집이 작았다. 여물지 않은 작은 손으로 화장실 수도꼭지를 망설임 없이 열었다. 콸콸 쏟아지는 물줄기에 손을 가져다 댔다. 물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두 손을 모아 물을 받아 얼굴에 끼얹었다. 차갑거나, 미끌거리는 혹은 특유의 수돗물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한 꿈이었다. 그러나 몰아치는 조바심을, 어린 시절 주현이 느꼈을 불안감을 통제할 수는 없었다. 그건 어른이 된 주현이 개입해 고칠 수 없는, 아주 깊게 새겨진 기억의 일부였다. 주현은 틈만 나면 세수를 했다. 20대 중반쯤 된, 부임한 지 이제 갓 1년 차인 주현의 담임선생은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는 주현을 유심히 관찰하고, 애써 말을 걸어주곤 했다. 주현의 집착적인 세수가 시작되었던 날, 그는 양쪽 눈썹을 다른 높이로 구부리며 말했다. 네 얼굴엔 그늘이 있구나. 용기보다는 무력함과 포기를 먼저 익힌 주현이었다. 그럼에도 얼굴에 묻은 그늘이란 건 어떻게든 제 스스로 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틈만 나면 찬물로 검댕을 지우듯 씻어내려 했다.


꿈에서의 장면은 뚝, 편집된 장면처럼 제멋대로 끊긴다. 세수를 하던 주현은 어느새 방 한구석에서 누군가를 기다린다. 아무런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지만, 주현은 안다. 누군가 올 것이었다. 기억이 제멋대로 뒤섞인 꿈이란 그런 법. 집에서 좀체 들리지 않는 웃음소리가 현관 쪽에서부터 들려온다. 상기된 것과 다정한 것이 오가는 평범한 대화 같지만, 주현은 늘 그것에 쭈뼛 털이 서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버지는 손님을 방 한가운데로 안내했다. 아버지는 아무렇지 않은데, 주현은 좁은 집이 부끄러웠다. 장면은 깜깜한 밤으로 제멋대로 전환되고, 좁은 집에 손님과 아버지와 주현이 나란히 눕는다. 키가 가장 큰 아버지가 어린아이처럼 가운데 누운 풍경. 주현은 가까운 벽을 향해 돌아누웠다.


“다 너를 위해서 그런 거지.”


너무나 생생한 목소리로 말해, 주현은 깜짝 놀랐다. 장면은 다시 아침으로, 또 어떤 날의 점심으로 마구잡이로 흐른다. 꿈속의 아버지는 이상하게 흐르는 시간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꿈속 여자의 얼굴은 눈코입이 없는 계란처럼 맨질맨질하다. 아무리 떠올려보려 해도 기억나지 않는 얼굴. 아버지는 같은 말을 반복하고, 여자는 머리 길이가 짧았다가 길었다가, 사소한 것들만 바뀌는 날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주현은 빠른 속도로 키가 자란다. 월세로 살던 천장을 뚫고, 머리가 옥상 위로 튀어나올 때까지 자라고 나서야 주현은 이것이 꿈이라는 걸 다시 깨닫는다. 계란 얼굴을 한 여자의 배가 눈에 띄게 부풀어 오르자, 주현은 학교 근처의 고시원으로 홀로 이사를 했다. 여자는 입이 없는데도, 자꾸만 주현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주현은 무서웠다. 꿈속에서 주현은 늘 미련하게 이것을 자꾸만 현실이라 믿는 것이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데도, 자꾸만 콩벌레처럼 작게 몸을 웅크리고 두 팔로 정강이를 감싸 앉게 된다.


*


축축하게 젖은 베개 위에서 주현은 잠에서 깨어났다. 일어나 앉아 시계를 바라봤다. 새벽 3시가 넘은 시간. 몽롱한 상태로 지난 세월을 다 통과한듯한, 끈적하게 달라붙은 꿈을 떨치기 위해 애썼다. 지긋지긋하도록 반복되는 꿈이었다. 이젠 그것이 주현이 멋대로 만들어낸 환상인지, 진짜의 기억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비틀어 짜면 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베갯잇을 벗겨냈다. 아직 이 집의 주인이었던 명희의 질서에 익숙하지 않은 주현은, 되는대로 화장실 선반에 잘 개켜진 흰색 수건 한 장을 꺼내와 베갯잇 대신 덮어 두었다.


갈증이 일어 물을 마시러 1층으로 향했을 때였다. 유리컵을 쥐고, 싱크대 앞에서 물을 틀려던 그 순간 주현은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소리를 들었다.


아우우우우-


늑대 소리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늑대에 가까운 야생 들개의 소리일지도 모른다고 주현은 생각했다. 처절한 울음소리는 자꾸 이어졌는데, 문제는 그 소리가 점점 더 크고 분명하게 들려온다는 것이었다. 위협적인 무언가가 주현이 머무는 곳 가까로 다가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유리컵을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주현은 1층을 조심스럽게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출입문과 창문이 잘 잠겨 있는지 하나씩 확인했다. 오래된 창문의 잠금장치는 허술했다. 창틀을 가볍게 손에 쥐었을 뿐인데도, 태풍이 불 때처럼 요란한 소리를 냈다. 주현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창문 너머로 깊은 밤 잠을 자고 있는 앞마당이 보였다. 희미한 빛에도 빨랫줄의 긴 그림자가 일렁일렁 마당에 진한 선을 그었다. 창문에 바짝 붙어선 채로 주현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마당 왼편으로는 마을의 경계인 높은 산맥이 보였고, 조금 더 가까이로는 마을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능만산이 눈에 들어왔다. 산은 무엇을 품고 있는지 분간할 수 없게 온통 검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홀로 버티는 것에 단련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주현이었다. 그러나 실체를 가진 무언가가, 심지어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가졌을 무언가가 마당 가까운 곳에서 울부짖고, 맴돈다는 사실은 주현의 온몸을 뻣뻣하게 굳게 만드는 데 충분했다. 주현은 유리창에 바짝 붙어 선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콧김과 입김이 만드는 둥근 원이 커졌다가 작아졌다가를 반복했다.


타닥타닥.

낮고 빠른 발소리를 분명히 들었지만, 시야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주현은 담벼락 아래나 나무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더 짙은 어둠 속을 유심히 살폈다. 발소리는 그보다 훨씬 가까운 것이었다.


'경찰... 아니 구급대원을 부르는 게 맞을까? 이런 시골까지 출동을 하려면 얼마나 걸리게 될까. 내 목숨은 그때까지 붙어 있을 수는 있나?'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바로 옆에 있는 카운터까지 숨죽이며 걸어갔다. 카운터 테이블 위에는 오래된 유선전화기 한 대가 놓여 있고, 한쪽 벽면엔 주요 마을 사람들의 비상 연락망이 코팅되어 붙어 있었다. 연락망의 가장 위쪽에 쓰인 왕영춘의 이름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수화기를 들고 숫자를 누르자, 금세 뚜르르르, 연결음이 들려왔다. 그때였다.


또독 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을까. 주현은 신호음이 길게 이어지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전화가 연결되지도 않았는데, 영춘이 벌써 왔을 리 만무했다. 그럼 누구인가. 잔뜩 예민해진 청각이 출입문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크게 증폭시켰다.


쓱 쓱 쓱.


거친 표면을 문지르는 것 같기도, 뭉툭한 것으로 무언가를 긁는 것 같기도 한 소리였다. 주현은 출입문 쪽으로 용기를 내 다가 갔다. 걸어가는 동안 온갖 끔찍한 상상들이 이어졌다. 죽고 싶다고 생각한 무수한 순간들이 있었지만, 짐승에게 잡아 먹혀 죽는 상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너덜너덜하게 찢긴 채 숨통이 끊기는 일. 주현은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죽는 게 그런 처참한 일이라면,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간절히 살고 싶었다.


적막이 흘렀다. 불 꺼진 다방 1층에서 그대로 멈춰 선 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주현은 이 순간이 비현실적인 어떤 것처럼 느껴졌다. 더 찐득하게 달라붙은 꿈의 일부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엔, 주현은 바짝 긴장했던 몸의 힘을 풀고 주변을 한 번 휘 둘러보기까지 했다. 아버지와 얼굴 없는 여자와 자신이 살던 단칸방은 아닐까. 꿈이 아니라면 주옥빌라에서 식음을 전폐한 시간 동안 망가져 버린 머리가 만들어낸 망상인 것일까. 뒤엉킨 생각들은 순서 없이 주현의 머릿속에서 떠들기 시작했다. 출입문 바깥쪽으로 무언가 빠르게 날아들어 부딪히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탕! 쨍그랑!


주현은 깜짝 놀라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공포 앞에서 주현은 그와는 상반되는 소리를 들었다. 히유우우웅, 하고 입구가 좁은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소리였다. 일정한 호흡으로 마침표를 찍고 반복되는 소리들. 주현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작은 동물의 끙끙대며 앓는 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출입문 잠금장치를 풀고, 손잡이를 단단히 움켜쥔 뒤 한 뼘 정도만 문을 열었다. 틈 사이로 둥근 원반 같은 것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아랫부분이 넓고 윗부분이 좁은. 가운데가 움푹 파인 그것. 부분 부분 뜯어보고 나서야 주현은 그것이 개 밥그릇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문을 조금 더 열어 보았다. 작은 동물의 몸통이 만들어내는 가쁜 숨소리가 먼저 들려왔고, 그다음이 모습이었다. 주현의 지금까지의 모든 행동을 호들갑으로 만들어버릴 그런 무해한 얼굴의 개 한 마리가 현관문 앞에 앉아 있었다.




긴 몸통에, 계단 하나 오를 수 있을까 의심이 되는 짧고 통통한 다리. 쫑긋한 귀에, 납작한 얼굴과 짧은 주둥이. 갈색과 노란색, 흰색 털이 규칙 없이 뒤섞인 개였다. 신체를 이루는 대부분의 것들이 둥글고 뭉툭하고 납작해, 이처럼 위협적인 요소라고는 하나도 없는 개가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개는 밥그릇을 집어던진 유력한 용의자이지만, 출입문에서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풍성하게 털이 박힌 꼬리를 좌우로 흔들 뿐 더 이상 거리를 좁혀오진 않았다. 주현은 그것이 개의 배려처럼 느껴졌다.


바닥에 뒤집어진 채 놓여있는 그릇을 집어 들었다. 개는 앞다리를 쭉 뻗어 길게 몸을 늘리는 스트레칭을 하더니, 이내 신나는 기분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주현이 그릇을 들고 출입문 안쪽으로 몸을 돌리자, 개는 더 빠른 속도로 꼬리를 치기 시작했다. 밥을 달라는 거구나. 개는 이러한 류의 몸의 대화에 무척 익숙한 듯 보였다. 그러고 보니 장식장 안의 김명희 사진에도 이 개가 함께 찍혀 있었던 것 같았다. 초면이지만, 배고픈 개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주현이 부엌 쪽으로 향하자, 더 빠른 속도로 제자리에서 돌던 개가 멈춰 섰다. 몸통을 하늘 쪽으로 길게 늘어뜨리며 주둥이를 치켜들었다. 고작해야 병뚜껑 크기만큼 작은 크기로 동그랗게 모은 입으로, 몸집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우렁차고 긴 하울링을 했다.


아우우우우우-


불 꺼진 주방에서 몇 분 여의 탐색 시간을 거치다가, 바 테이블 아래 수납장에서 대용량 개 사료 포대를 발견했다. 그릇을 통째로 포대 안에 밀어 넣어 사료를 가득 펐다. 출입문과 앞에 그릇을 놓아주고, 주현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개는 침을 잔뜩 흘리면서도 밥그릇 앞으로 곧장 달려가지 않았다. 주현 쪽으로 천천히 다가와 천천히 꼬리를 흔들었다. 주현과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개는 엉덩이를 바닥에 깔고 앉아 한쪽 앞발을 악수를 청하듯 들어 올렸다. 주현은 개의 동그란 앞발을 손으로 쥐어보았다. 하나, 둘, 셋. 악수를 하듯 흔들어보았다. 이게 개가 원한 것이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인사했으니까 이제 밥 먹어."


개는 입을 헤 벌리고, 마치 웃는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인 뒤 그릇으로 돌진했다. 고개를 한 번도 들지 않고 그릇에 있는 사료를 순식간에 비웠다. 주현은 물도 한 그릇 떠와 나란히 놓아주었다.


개가 찹찹찹, 소리를 내며 물을 먹는 소리를 들으며 주현은 연거푸 이어지는 하품을 했다. 긴장이 완전히 풀렸는지, 온몸에 기운이 쭉 빠졌다. 개가 그랬던 것처럼, 몸을 길게 늘어뜨리며 주현은 마당을 한 바퀴 돌았다. 잔잔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미지근한 새벽 공기엔, 물에 불린 다시마에서 나는 짜고 비릿한 내음이 섞여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검은 장판 위에 쏟아진 쌀알처럼, 하얀 별이 무수히 빛나고 있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 무언가 위협적이고 두려운 무언가가 섞여 있지 않을까 떨던 그 시간 동안에 밝게 빛나는 것들이 주현의 바로 위에 있었던 것이었다.


밥도 물도 다 먹은 개가 주현이 앉은자리 가까이로 다가왔다. 거칠고 빳빳한 털 사이로, 밤 이슬이 군데군데 맺혀 있었다. 개는 자꾸만 머리를 내밀었다. 밥도 얻어먹고, 당당하게 스킨십도 요구하는 뻔뻔한 개였다. 주현은 개를 어떻게 만지는지는 잘 모르지만, 개가 내민 머리 정수리 가운데 부분을 손끝으로 가만가만 긁어보았다. 개는 그대로 굳어버린 것처럼 멈춰 주현의 손길을 느꼈다. 개의 목엔 이름표가 달려 있었다.


“네 이름이 두콩이야?”


개가 뾰족한 귀를 움질거렸다. 제 이름을 알아듣는 것일까. 주현이 두콩이라는 이름을 한 번 더 말하자, 두콩은 가만히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주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는 최주현이야."


주현은 흙바닥에 그대로 엉덩이를 깔고 앉은 채, 개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털에선 쿰쿰한 야생의 냄새가 피어올랐다. 주현의 손에도 그 냄새가 진하게 베어 들어갔다.


“아이고! 아이고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가 있는 방향에서, '아이고, 아이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찌나 그 소리가 큰지 마치 커다란 산이 외치는 것 같았다. 소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나무 위에 나뭇잎처럼 잠들었던 새들이 푸드덕 날아올라 하늘 위로 흩어졌다.


영춘이었다. 파자마를 입은 영춘이 끝이 날카로운 쟁기를 들고 뛰어오고 있었다. 빼곡히 박힌 별들을 뒤로하고, 영춘은 아주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주현은 영춘이 영화에서나 볼 법한 우주 여전사 같다고 생각했다. 영춘은 금세 마당으로 들어와, 주현의 앞에 우뚝 서 사방을 경계하며 쟁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전화를 허구, 아무 소리를 안 해서 이거 무슨 일이 났겠구나 했다. 다친 데는 없고?"

"처음에는 늑대가...."

"늑대가?"


영춘이 마치 눈앞에 늑대가 있는 것처럼, 허공에서 쟁기를 휘둘렀다. 쟁기를 휘두를 때마다 붕붕,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뇨. 그게 아니라, 이 개가 밥을 달라고 집엘 찾아왔는데."


영춘은 들고 온 쟁기를 벽에다 쓰러지지 않게 잘 세워두었다. 몇 번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부들부들한 파자마를 입은 영춘, 안심을 하는 영춘은 주현에게 훨씬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가슴을 부풀리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은 영춘은 한낮에 그랬던 것처럼 금세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주현의 옆에 있던 두콩의 꼬리가 뒷다리 사이로 말려 들어갔다. 영춘은 뚜벅뚜벅 걸어 두콩 앞에 와 검지 손가락을 조금 더 높게 구부린 주먹을 만들어 두콩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깨갱. 두콩이 앓는 소리를 냈다.


"요놈이 똑똑은 한데, 가끔씩 이렇게 사고를 쳐. 우리 마을에서 개명을 한 개는 이놈뿐일 게다."

"원래 이름은 뭐였는데요?"

"누런 털이 있어서, 대충 누렁이. 사고를 치고 머리를 콩콩 한 대씩 쥐어 박히다 보니 두콩이가 됐지."

“그나저나 어르신.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놀라긴 했는데, 어디 연락할 사람이라고는....

“죄송하다는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이럴 땐 고맙습니다, 하는 거지.”


영춘은 쟁기를 다시 챙겨 갈 채비를 했다. 요즘 덩치 큰 멧돼지가 마을에 나타나서 말썽을 부린다거나, 두콩이 밥은 미리 낮에 잔뜩 퍼서 배불리 먹이는 편이 좋다거나, 내일은 진짜 중요한 행사가 있다거나 하는 혼잣말 같은 이야기들을 주현이 들릴락말락하게 이어나갔다.


“무슨 일 있으면 또 전화하고.”


주현은 영춘을 배웅했다. 영춘이 어두운 시골길에 깔린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한참이고 바라봤다. 주현의 옆에서 느린 속도로 꼬리를 치던 두콩이 먼저 출입문 쪽으로 달려갔다. 익숙한 듯 출입문 안쪽에 자리를 잡고, 제 발을 베개 삼아 똬리를 틀듯 자리를 잡은 두콩이 눈을 감았다. 주현은 출입문을 단단히 잠가두고,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베갯잇 대신 깔아 둔 수건 위에 머리를 가져다 댔다. 두 손에선 두콩의 냄새가 진하게 피어올랐지만, 손을 씻는 일은 졸음이 쏟아져 자연스럽게 미뤄졌다.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 전화할 곳이 생긴 밤, 늑대 같이 우는 개와 함께 잠드는 밤. 주현은 악몽을 더 이상 꾸지 않을 자신이 생기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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